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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늙어가는 길/윤석구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무엇 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었지만 늙어가는 이 길은 몸과 마음도 같지 않고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곤 합니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어릴 적 처음 길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었고 젊어서의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처음 늙어가는 이 길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언제부터 인가 지팡이가 절실하고 애틋한 친구가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가다 보면 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노욕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두리번 찾아봅니다. 앞길이 뒷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발 한발 더..
시인 시가 직업이길 나는 원했지만 나의 직업은 허가받지 못한 철부지 공상이었다 시인이 되기엔 시보다 사람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산봉우리에 걸리는 저녁놀처럼 아름답게 사람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호반새 삭정이를 물고 둥지로 날아가듯 사람 사는 거리와 집들 세..
길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 이상윤 길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시간의 재가 되기 위해서 타오르기 때문이다. 아침 보다는 귀가 하는 새들이 더 정겹고 강물위에 저무는 저녁 노을이 아름다운것도 이제 하루 해가 끝났기 때문이다. 사람도 올때보다 떠날때가 더 아름답다. 마지막 ..
처녀치마꽃 처녀치마꽃 어둠은 분명 무언가를 버스는 2시간 뒤에 올 거라고 하네 마침 정류장 옆 과수원에는 사과가 익어가고 저녁 비가 부슬거렸네 발등을 타고 올라온 풀벌레 소리는 가느다란 울음을 어딘가로 옮기고 있었네 유리칸막이 옆으로 나란하게 붙은 비안개의 방 올 풀린 비..
마음이 춥지 않은 자들만 살아 남을 것이다 겨울의 추위에도 얼지 않을 한 마음을 생각해 보면 나에겐 속죄해야 할 명백한 옹졸함이 있다 언제나 고집하는 낡은 수법의 신상명세를 바라본다. 때로, 그것은 맥 빠진 자동인형을 연상케 한다 . 남루한 혈관 속에서 영혼을 황폐케 하는 신경..
뼈아픈 후회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
그는 / 정호승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
당신은 나를 울려 놓고 / 김정한 당신은 나를 울려 놓고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난 당신을 사랑해서 운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참 후에 또 당신은 나를 울려 놓고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의 사랑을 확..
미친 그리움 / 원태연 한때 그리움에 미쳐 있을 때 잠들기 전 아침에 눈뜨게 되는 걸 두려워했었다 그 그리움 내 주량을 배로 늘려주었고 용돈의 상당량을 담배 값으로 날리게 하였다. 엉망으로 취해 잠드는 날은 전화기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고 아침이면 심한 두통과 쓰라린 속 덕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