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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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의 벤치

치마를 붙잡고 있느라고

까미l노 2015. 3. 28. 11:21

처녀 치마꽃

처녀치마꽃

처녀치마

 

 

세상에서 제일 예쁜 치마.jpg

 

처녀치마꽃

 

 

 

어둠은 분명 무언가를 

 

버스는 2시간 뒤에 올 거라고 하네

마침 정류장 옆 과수원에는

사과가 익어가고 저녁 비가 부슬거렸네

 

발등을 타고 올라온 풀벌레 소리는

가느다란 울음을 어딘가로 옮기고 있었네

 

유리칸막이 옆으로 나란하게 붙은 비안개의 방

올 풀린 비가 담배연기처럼 떠돌았네

 

불안의 깊이가 다른 두개의 방은

똑같이 아득한 끝을 품고 있었네

투둑투둑 검은 소리들이 과수원을 덮쳤네

 

농익은 시간을 끌어안고 있는 둥근 지붕들

사과는 이제 조그마한 꽃 속으로 자신을 돌려보낼 수가 없네

 

한 세계에서 탈락 되었을 때

추락한 깊이 보다 높게 다른 삶이 튀어 오르겠지만

비오는 여름밤에 이미 단풍드는 세월도 있었네

 

멀리 헤드라이트 불빛이 보이고

빗줄기는 얼룩말처럼 반갑게 뛰어왔네

혼자 남은 정류장은 화난 소년처럼 금세 어두워졌네

 

그러나 닿고 싶은 곳이 있는 한 기다림은 유지될 것이네

푸른 어둠은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지만

하고 지나가는 향기뿐이었네

 

 이영옥

 

치마를 붙잡고 있느라고

 

 

바람이 그렇게 세게 부는 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고 치마를 입고 나왔는데

아무리 치맛자락을 꼭 붙잡아도

부끄러움을 꺼내놓는 바람

이미 발톱 구부러진 바람의 육체는

타협을 몰랐다

 

치마를 붙잡고 있느라고

소지품처럼 지니고 있던 아름다운 환상이 날아갔다

 

치마를 붙잡고 있느라고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가방이 흘러내리고

눈썹이 삐뚤어지고 한 쪽 귀가 뜯겨 나갔다

 

치마를 붙잡고 있느라고

약속 시간은 지나가고 나는 실종되었다

 

치마를 붙잡고 있느라고

나를 기다리던 당신이 지워졌다

 

치마를 붙잡고 있느라고

번개에게 목이 그인 하늘이 살해되는 줄 몰랐다

 

치마를 붙잡고 있느라고

내가 영원히 사라지는 줄도 몰랐다

 

겨우 치마를 붙잡고 있느라고

 

이영옥

 

<다층> 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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