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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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은지심

재혼 #1 새아빠의 도시락

까미l노 2015. 12. 13. 20:21

 

                                                                                        

 

고구마밥

노란 황토 고구마를 쌀 위에 얹어 밥을 해봤다.

 

얼추 십여 년쯤 전 재혼을 약속하고 그녀의 집까지 가서 인사까지 했었고 아이들도 찬성하는 동거 비슷한 걸 했었던 기억

그녀에게는 초등 6학년 고등학교 2학년 된 딸이 둘 있었고 철이 없는 편이라(?)

모든 음식거리가 시골 부모에게서 오는데 냉장고에 더 이상 쟁여둘 칸이 모자랄 지경으로

요리에 별 관심도 없었지만 하는 것도 귀찮아할 정도였다.

 

한부모 모임 여행 때 요리를 하고 싱크대에서 설거지하던 내 뒷모습을 보면서

세 모녀가 속닥거렸다던 말 "저런 아저씨가 우리 아빠되었으면 좋겠다"...라고

그렇게 나에게 작심하고 접근을 했던 두 딸의 엄마인 그녀

 

당시 진주에서의 직장생활이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라 금요일만 되면 경기도까지 주말을 보내러 올라가곤 했었는데

아이들은 금요일마다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친하게 지낸 이유도 있었지만 다양한 먹거리를 만들어 주었기 떄문이기도 했다.

 

재료는 냉장고에 그득하니 닥치는대로 만들어도 아이들 입맛에는 괜찮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냥 김치에 매일 먹던 밥 보다 특식(별 특별하지는 않겠지만)을 아이들 대부분이 좋아했기에

주로 간장떡볶이 돈가스 쇠고기햄버거 오무라이스 별난 볶음밥 같은 양분식을 자주 해줬었다.

 

재혼이야기...

당시 한부모는 지금처럼 드러내놓기엔 다소 조심할 때였는데 

재혼 문제로 내게 고민상담(?)이라도 해올라치면 나는 반드시 아이들과 먼저 친해질 수 있느냐로 결정하라고 했고

원하는 바와 좋은 점 따위는 만사 제쳐두고 반드시 절대 안 되는 것들 몇가지 정도를 서로 맞춰 보라고 조언했었다.

 

조건이란...

이것 되고 저것 있어야 되고 뭐뭐 해줘야 되고 따위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만은 절대 안 된다를 우선 시 하면 나머지는 그닥 우여곡절 없이 넘어갈 수 있다.

 

 

작은 아이는어려서인지 아직 떼 쓰고 샘 내는 타입이었고

큰애가 유독 나를 좋아하고 잘 따랐었는데 금요일 저녁엔 꼭 씨름을 하자고 덤비는 통에

처음엔 많이 당황했었다만 다행 사춘기와 새아빠에 대한 거리감 같은 건 없는 듯 해서 지 엄마와 동생보다 나랑 더 친했었다.

 

종종 등교길에 차를 태워줬었고 저렇게 만든 도시락에 용돈과 편지를 넣어 놓기도 했었는데

한 번은 급우들에게 들켰는데 색색깔로 매일 바뀌어지는 도시락과 편지 그리고 용돈까지 넣어줬었다.

(편지 내용이래봐야 오늘은 왕창 먹고 아저씨랑 씨름에 꼭 이겨봐라 등...)

 

새아빠가 될지도 모른다고 아주 친한 급우들 몇몇은 알게되어 가끔 집에 데리고 와서

내가 만들어준 엉터리 요리도 먹고 때론 분식점에 가서 함께 맛있는 것도 먹고 그랬으니...

 

그러면서 그 아이는 내가 지 새아빠가 되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었고

조금씩 아빠 라는 호칭을 속으로 연습하던 중이었다고  나중에 지 엄마에게 실망을 느끼면서

다시는 지 앞에서 아저씨 아닌 다른 남자랑 같이 있는 것 보이지 말라고 그랬다는데...

 

어느 때 부터인가 애들 엄마의 눈치가 이상하길래 살펴봤더니

전에 있었던 싱글들의 모임에 다시 나가기 시작하면서 나 보다 더 조건이(?)좋은 남자랑 설왕설레를 하던 중이었다.

 

눈치 없이 따지기도 싫고 이젠 오지 않겠다며 아이랑은 연락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대뜸 혼란을 줄지(?)모르니 하지 말라고 하더만...

 

그런 줄도 몰랐던 아이는 한동안 오지 않는 나를 기다려 제 엄마에게 물었고 사실을 곧이 곧대로 알렸을 리 만무했을 게 뻔한데

엄마가 아저씨 싫대 너 혼란 생길까봐 연락 않는 게 좋다고 하더라고 처음이자 마지막 전화에 대답을 했었더니

아빠 라고 부르는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라며 울먹이던 아이...

 

 

아마 아이가 정말로 나를 지 새아빠라고 믿기 시작했었던 게

그 무렵 쯤 아니었을까 싶었던 사건이(?) 있었는데

 

나도 문제가 있었다는 걸 인정했어야 했지만

여고생 딸을 가진 엄마가 아직 결혼하기 전의 남자랑 한방에서 같이 생활을 했었으니

다행 아이들은 별 거부감 없이 나를 받아들여 줬었던 것 같았기에 망정이지 지금 돌이켜보면 나도 철이 없었지 싶다.

 

어느날엔가 아이의 시험 기간이라고 내게 말해주지도 않은 제 엄마는 나와의 잠자리에서

괴성을(?)질렀었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내 눈엔 방문 틈 아래 불빛으로 누군가가 지나가는 그림자를 보게 됐는데

황급히 애 엄마의 입을 눌러 틀어막고 큰애가 아직 안 자는 것 같다고 했더니 시험기간일 거라면서

아마 아직 안 자고 공부 중일 거라고 태연하게 이야기 하던...

 

그야말로 식겁은 겁 축에도 끼지 않을만큼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르고 간은 콩알만 해졌었는데

다음날 아침 나는 아이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했지만 아이는 아무 것도 모르는 듯 평소와 똑 같이 행동 했었다.

아이는 정말 아무것도 눈치를 못챘던 것일까...

 

살면서 오랬동안 어른답게 잘 하지 못해 미안했던 그 아이도 지금은 어른이 되었을 것이고

2년 후쯤 들리는 이야기에 홍대로 진학을 하게 됐었다고 했었는데 지금쯤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을지도 모르겠다...

 

 

내일 점심 도시락은 말린 표고버섯과 두부 브로콜리 그리고 토마토를 으깨어 프라이팬에 살짝 익혀

말린 홍새우 벌꿀 토마토소스콩과 삶은 고구마 호두 아몬드를 섞어 비볐다.

 

 

 

현미가 대세인지라 검은 찰현미를 섞은 오곡보다 더 다양한 십곡밥 누룽지를 만들었다.

맨밥으로 먹어도 간간한 기분이 드는 듯 하고 씹으면 꽤 고소함까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