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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서

편지 그 두근거리던 기다림

까미l노 2014. 6. 29. 21:16

 








가로로 스무 칸 세로로 열 칸

이십 곱하기 십 해서 생겨나는 게 이백자 원고지다.

세로로 놓고 쓰기도 했지만 가로로 놓고 쓰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원고지 가로로는 밭이랑처럼 칸과 칸 사이의 여백의 줄이 있었다.

그 줄은 행과 행 사이의 간격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만약에 그 '간격의' 거리감이 없었다면 원고지에 적힌 글이 그토록 우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텅 빈 원고지를 바라보고 있다.

아직은 아무 생각이 없지만펜엔 이미 잉크를 묻혔다.

잉크에선 신선한 피 냄새가 난다.

원고지 첫째 줄 스무 칸은 비워놓고 둘쨰 줄 중간쯤에 제목을 적기 직전이다.

'사라지는...' 작은 따옴표 하나 적자고 원고지 한 칸을 쓰기는 좀 아깝지만 고감하게 한 칸을 배정하고 '사' '라' '지' '는' 을 한 칸에 한 자씩 쓴다.

점은 한 칸에 두개씩 찍는다.

그렇게 제목을 쓰고 나면 행을 바꾸고 오른쪽에서 두 칸이 남게 이름을 적어 넣는다.

그러고는 한 줄 스무 칸을 비워놓고 그 밑의 줄부터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글이 잘 달릴 수 있게 하려는 배려일까?

글 시작의 첫쨰 칸은 육상 선수들이 스타트 라인에서 한쪽 발로 딛고 있는 스타팅 블록처러ㅁ 비워져 있다.

펜이 그 첫 칸을 지나갔다면 글이 씌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글은 그렇게 잉크 새듯이 나오진 않는다.

원고지를 앞에 두고 있으면늘 뛰어 내리지도 못할 벼랑끝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 싶지만 벼랑 끝에서만 보이는 풍경이 따로 있어 쉽게 뒷걸음질쳐지지도 않는다.

 

수많은 세월의 탄식이 갈매기  파도소리로 바람 소리로 들려온다.

마른 펜에 잉크를 묻혀 그 소리를 받아 적는다.

이백자 원고지의 줄 칸 안에 검정 먹글씨가 새겨진다.

펜이 원고지 위를 달리는 소리가 바람에 떨리는 아기 대나무 잎에서 나는 그 속삭임 같다.

 

생각과 생각 떨림과 떨림 사이에서 글이 나온다.

페이브먼트를 또각또각 걷는 하이힐 신은 여인의 발자국 같은 글씨가 있는가 하면

거나하게 취해 한 쪽 발도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취객의 발걸음 같은 글씨도 있다.

어떤 걸음이든 다 인생의 걸음이어서 원고지를 휘젓고 가는 그 발자국마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긴다.

 

글은 풀어진 그림이다.

글자 한 획 한 획 그어질 때마다 형태가 생기고 색이 더해진다.

그것은 풍경화가 되었다 인물화가 되었다 어느 순간에 바람도 그려지고 붉은 피 철철 흐르는 심장이 되었다차가운 눈물이 그려지기도 한다.

이백자 원고지는 거대한 캔버스가 된다.

거기에 '토지'가 펼쳐지고 '태백산맥'이 이어지고 '인간시장'이 들어섰으며 '영자'가 찾아오기도 하고'철수와 미미'의 사랑이 수채화처럼 그려지기도 했었다.

가만히 보면 이백자 원고지 빈칸마다  맥박이 뛰었으며 그 빈칸마다 생의 순간이 담겨있다.

원고지가 어떻게 종이일 뿐이며 그 위의 글씨가 어찌 기록일 뿐이랴,

이백자 원고지는 아직 안 적어 내려간 삶이고 아직 말하지 못한 소망이고 아직은 이루지 못한 사랑이다.

 

이백자 원고지가 사라진다.

이제는 삶과 사랑을 인터넷이나 휴대폰에 쓴다.

이백자 원고지에 양파즙으로 써내려간 비밀 연애편지에 불을 비춰볼 여유도 없다.

이 시대의 우리에겐 두근거리는 기다림도 사치가 돼버렸다.

 

조선일보

빨간 칸 '200자 원고지' 없으니...글 쓰는 두근거림도 없구나

가수 김창완씨의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전문

 

 

받을 편지는 커녕 보낼 편지라는 것도 있을 리 없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무슨 원고지 타령이냐 하겠지...

말 줄임표는 점 세개 오타를 지우기 어려울 때는 돼지꼬리표...등 서식도 띄워 쓰기도 간혹 까다롭게 느껴지기도 했고

이름 제목 한 줄 띄우고 칸을 벌리고 등 등 원고지라는 칸을 채워 글을 쓰는 것은 일반일들 보다는 어떤 류든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만 하던 행위였기도 하다. 

 

나는 어릴적부터 괴팍했었던 것인지 스스로는 잘 몰랐지만 주로 편지를 원고지에다 써서 보낸곤 했었다.

그것도 이백자 원고지는 칸이 주는 허기로 인해 오백자 또는 8백자 원고지에다 주로 글을 쓰곤 했었는데 형식을 싫어하는 성격인지라

마음 내키는대로 쓰는 타입이라 어떤 때는 띄워쓰기 줄 바꾸기를 아예 생략하고   한 칸에 두 자씩 두 칸에 한 자씩 마음 내키는대로 쓰곤 했었는데

아마도 읽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이 오래 읽게하려는 성의였다고 믿었을게다...아마도...

 

지금도 내겐 만년필과 8백자 원고지와 엽서 우표들이 잔뜩 있다.

한동안 편지를 쓰지 않아서 또 다시 만년필 속 잉크는 굳어있을게다...

 

사라지는 것들 가운데 편지 그 두근거리는 기다림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음을 심하게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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