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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풍광과 역사가 함께하는 대수산봉 본문
"멋드러진 풍광과 역사가 함께하는 오름" | |||||||||||||||||||||||||||||||||||||||||||||||||||||||||||||
[다시 걷는 오름 나그네] <9>대수산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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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서 대략 44km·정상 왕복에 45분이면 충분 대수산봉은 눈으로 확인하는 현재와 머리로 헤아리는 역사가 어울려 있는 오름이다. 대수산봉은 비고가 97m로 높지 않으나 정상부에서의 경관은 도내 오름 가운데 압권이다. 한마디로 풍광의 종합선물세트다. 경관의 절반인 바다쪽은 성산일출봉과 '섬 속의 섬' 우도, 제주의 비경 가운데 하나인 섭지코지가 채우고 있다. 나머지 절반은 도내 동부지역 오름군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대수산봉은 제주민들의 삶과 역사를 바꿔놓은 제주목마장의 최초의 터인 수산평을 그 자락에 펼쳐놓고 있다. 물리적으로 작지만 역사적으로 큰 오름인 셈이다. 대수산봉은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2039번지에 위치한다. 비고는 97m로 도내 368개 오름 가운데 127번째로 높고 면적은 26만522㎡로 146번째인 '중급' 오름이다. 표고는 137.3m이고 저경과 둘레는 각각 736m와 2094m다. 이름은 예전에 오름에 물이 솟아나 못을 이뤘다고 하여 '물메(뫼·미)'라 했으나 동쪽에 있는 '작은 물메'와 구별하기 위해 '큰 물메'로 부르다 한자명인 '대수산봉(大水山峰)'으로 공식화됐다.
탐방로가 보도블럭으로 돼 있어 오르기는 쉬우나 아무래도 '자연의 맛'은 덜하다. 탐방로를 출발, 10여분 지나면 분화구를 만난다. 대수산봉의 분화구의 둘레는 약 380m에 깊이는 10m가 채 안되고 덤불에 뒤덮여 있어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이곳에 샘물이 있었으나 중국 송나라의 '호종단(胡宗旦)'이라는 사람이 와서 제주의 다른 수맥들과 같이 눌러버려 샘이 말라버렸다고 한다. 분화구는 시계방향으로 도는 게 좋다. 절반 정도 돌면 앞쪽에 봉곳한 봉우리 형태가 눈에 띈다. 대수산봉의 정상이다. 이곳의 경관은 가히 압권이다. 북동쪽의 성산일출봉만도 웅장함으로 충분한데 그게 아니다. 전망의 꼭 절반은 바다로, 나머지 절반은 뭍의 풍경으로 채워진다. 북쪽의 섬 속의 섬을 지나면 지미봉·알오름·다랑쉬오름 등 남쪽까지 180도를 돌며 제주 동쪽지역 오름들이 눈에 들어온다. 남쪽 바다로 들어서면 제주의 비경 가운데 하나인 섭지코지가 있고 그 뒤로 태평양으로 달리는 제주바다가 펼쳐진다. 정상부에는 봉수대가 있다. 조선시대 북동쪽의 성산, 남서쪽의 독자봉과 교신했던 대수산봉 봉수대는 복원된 느낌이다. 20년전 김종철 선생은 '오름나그네'에서 "봉수터로 보이는 흔적이 마루터기에 남아있다. 풀숲에 덮인 군데군데에 돌덩이 밝힌 흙이 드러나 있고 이를 둥그렇게 에운 두덩 사이에는 돌아가며 골이 파여져 있어 그 터임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하다"고 적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제주 대다수의 봉수처럼 가운데를 도드라지게 하고 그 주변을 이중으로 고랑을 파고 목책을 둘러놓았다. 토산봉수와 달리 이곳은 개방돼 있어 봉수대 정상에서의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봉수대 정상을 떠나 분화구를 시계방향으로 돌면 동쪽의 '소공원'이 맞이한다. 벤치가 있어 준비해간 음료를 마시며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에 좋다. 봉수대 정상이 '입석'이었다면 여기는 '좌석'이다. 주변에 산소가 있기는 하지만 먼저 간 어른들과 같이한다고 생각하면 어색할 이유가 없다.
일출봉과 섭지코지 등 풍광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동쪽 탐방로 입구 쪽으로 내려오면 45분 정도 소요된다. 정상까지 오르는 데만은 20분이지만 풍광을 즐기고 음료를 마실 여유는 있어야 한다. 대수산봉을 중심으로 펼쳐진 광활한 지대인 수산평(水山坪)은 1276년(충렬왕 2) 당시 몽골에서 파견된 탐라 관부의 최고책임자 '다루가치'로 부임해온 탑랄적(塔剌赤)이 몽골말 160마리를 풀어 기르면서 제주 목마장의 발상지가 됐다. 김일우 박사(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 책임연구원)는 "이듬해에 목마장은 한경면 고산리 일대로 확대됐다"며 "말이 특히 잘 번식되자 몽골은 계속 말을 들여와 충렬왕 26년에는 탐라목마장은 몽골의 14개 국립목장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제주사람들은 몽골족의 사육 기술자인 '하치'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이후 '말이 크게 번식해 산야에 가득했다(충렬왕 26년)'는 기록이 있다"며 "구체적으로 당시 제주사람이 3만여명에 버금가는 2만~3만 정도의 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대수산봉은 젊지 않은 오름으로 분석된다. 강순석 제주지질연구소장은 "분화구가 조그맣지만 원형 분화구로 봐야 한다"며 "오래된 오름 측에 들어간다. 20만~30만년에서 40만년전까지 본다"고 밝혔다. 물이 없는 물메에 대해 강 소장은 "표층이 송이로 돼 있고 그 하층부는 용암이 받쳐 있어 물이 나올 조건은 된다"면서도 "물이 나오길 기원하며 이름을 붙였을 수도 있다"고 했다. 대수산봉의 식생은 정상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지역이 곰솔 및 삼나무 조림지다. 상록활엽수인 참식나무·후박나무·생달나무 등 녹나무과(科)식물이 혼재하는 특징도 보인다. 김대신 연구사는 "인위적으로 형성된 공간에는 녹나무과 어린나무뿐만 아니라 예덕·말오줌때·천선과나무 등이 경쟁하듯 자라고 있어 흥미롭다"며 "특히 참식나무는 기후변화에 따라 분포지역이 넓어질 것으로 보이는 한반도 식생변화의 중심에 있는 식물종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글·사진 김철웅 기자
◇기획 ‘다시 걷는 오름나그네’전문가 자문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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