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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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산청우

가을날의 산책 '강길' '들길' '산길' '꽃길'

까미l노 2012. 9. 18. 16:55

[웰빙에세이] 가을날의 산책,

걷기 위해 걷는 길





 

 

↑강길

산골에 와서 마침내 나만의 산책 길 네 곳을 완성했습니다.

올 한해 열심히 모색해서 만든 코스입니다.

이제 당신을 초대합니다.

당신과 같이 걷고 싶습니다.

이 길은 나 혼자 걷기 아깝습니다.

나는 이 길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강길, 산길, 들길, 꽃길! 내 인터넷 필명 '강산들꽃'에서 하나씩 따온 이름입니다.

나는 강이 좋습니다.

산이 좋습니다.

들이 좋습니다.

꽃이 좋습니다.

강산과 들꽃이 좋습니다.

강산의 들꽃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이 길은 내 필명을 걸고 보증하는 길입니다.

지금부터 이 길로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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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길

먼저 강길. 화천 읍내에서 시작해 북한강을 따라 원천리의 하남면 면사무소에 이르는 길입니다.

거리는 10km. 천천히 두 시간 걸으면 됩니다. 코스 전체가 강을 따라 걷는 길입니다.

 

봄가을엔 이른 저녁, 여름엔 늦은 저녁, 겨울엔 한낮이 좋습니다.

큰 하늘과 넓은 물이 만납니다. 그 곁으로 길이 따라갑니다.

 

물 흐르고 산 흐르고 길 흐릅니다.

바람 흐르고 구름 흐릅니다.

나도 흐릅니다.

 

눈을 뜨고 걸어도, 눈을 감고 걸어도 좋습니다.

걸리고 부딪칠 게 없습니다.

눈을 감으면 길이 내 안으로 들어와 다시 펼쳐집니다.

밖의 길과 안의 길이 서로 끌어안고 하나가 됩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길, 명상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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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길

다음은 산길. 집에서 뒷산 약수터에 오르는 길입니다.

약수터는 토보산 7부 능선쯤에 있습니다.

천천히 오르는데 50분, 내려오는데 40분 걸립니다.

 

약수까지 떠오려면 넉넉히 두 시간 잡는 게 좋습니다.

길은 30분가량 완만하게 산허리를 감싸고돌다가 후반부 20분 가파른 경사를 이룹니다.

 

옛날에는 이 꼭대기에까지 화전민이 살았다고 합니다.

마르지 않는 샘이 그들을 불러 모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묶은 집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화전민이 퇴거해서 마지막으로 산을 내려온 것이 1976년이라 하니 40여년이 흘렀습니다.

약수터 오르는 길은 깊은 숲입니다. 길가의 꽃은 날마다 바뀝니다.

올라갈 때 닫힌 꽃잎이 내려올 때 열립니다.

 

내려오다 시야가 트이는 곳에서 보면 이곳이 히말라야고 알프스입니다.

만년설을 머리에 두른 티베트의 푸른 고원길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길과 달리 겨울이 아니라 여름에 닫힙니다.

 

한 여름 풀이 무성해지면 길이 묻혀 헤치고 가기 어렵습니다.

한 키 넘는 풀밭을 더듬거리다가 앞을 가로지르는 멧돼지와 스친 이후 여름 몇 달 길을 폐했습니다.

하지만 늦가을 지나 산이 비면 다시 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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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길

약수터 곁에 자작나무 숲이 있습니다.

그 아래를 지나온 샘은 수액을 섞은 고로쇠 물처럼 달고 부드럽습니다.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은근히 스미는 물입니다.

나는 그 물을 실컷 마십니다.

내 안의 물을 바꿉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생명의 물입니다.

2.3ℓ 들이 페트병 세 개를 배낭에 넣고 두 개를 양손에 들고 내려오면 어깨가 뻐근합니다.

하지만 기분 좋습니다.

 

청량한 물과 공기로 안팎을 씻어낸 느낌입니다.

그래서 약수 마시는 사람보다 약수 떠오는 사람이 장수한다고 하겠지요.

이건 영업비밀인데 약수터 가는 뒷산엔 산삼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동네 이름이 서오지리입니다.

 

한자로 호미 鋤, 나 吾, 약초 芝, 마을 里. 옛날에 노인 셋이 호미로 약초를 캐며 살다가 붙인 이름이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약초가 많겠습니까. 하지만 내 눈엔 보이지 않습니다.

알지 못하니 보지 못합니다.

이걸 언제 다 보고, 언제 다 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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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길

다음은 들길. 집 앞 개울 건너 소태벌 지나 오탄리 다랑이논 들판을 빙 돌아오는 길입니다.

길게 다 돌면 2시간 반, 중간에서 접으면 1시간 반 정도 걸립니다.

저희 집 앞으로 지촌천이 흐릅니다.

 

멀리 광덕산에서 발원한 물이 화천 쪽에서 지촌천을 이루고, 포천 쪽에서 산정호수를 만듭니다.

지촌천은 광덕산-두류산-토보산 줄기를 따라 광덕계곡-용담계곡-곡운구곡 등 절경의 물길을 이루며 굽이져 흐릅니다.

 

영화 < 흐르는 강물처럼 > 을 보셨나요?

주인공 브래드 피트 가득한 저녁 햇살 속에서 낚싯줄을 던지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지촌천에서도 꼭 그와 같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산책 시간이지요.

아름다운 지촌천 위에 살짝 얹은 다리를 건너면 소태벌이란 조그만 벌판입니다.

왼쪽이 가을 황금들녘이고 오른쪽 아래는 지촌천입니다.

 

'소태벌'이란 소를 타고 다니던 벌판이란 뜻일까요.

그 벌판 한켠에 자리 잡은 농가 몇 집을 지나면 언덕이고 언덕배기를 넘으면 오탄리 온새미마을입니다.

산간분지인 이 동네도 그림 같습니다.

 

산비탈을 따라 다랑이논과 다락밭이 펼쳐져 마치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기분입니다.

양구의 유명한 고원분지인 '펀치볼'을 줄여서 옮겨 놓은 듯합니다.

특히 윗마을로 오르는 길에는 단풍나무 숲이 아름답고 그 숲이 끝나는 지점에 하늘 탁 트인 고갯마루가 있습니다.

 

그곳에 푸르게 홀로 선 키다리 나무! 영화 < 엽기적인 그녀 > 에서

차태현과 전지현이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며 타임캡슐을 뭍은 나무, 영화 < 쇼생크 탈출 > 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팀 로빈슨이 가석방된 친구 모건 프리만을 초대하는 비밀 편지를 뭍은 나무, 바로 그 언덕 그 벌판의 그 나무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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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길

마지막으로 꽃길. 서오지리 건넌들 연꽃단지에서 동그래마을 야생화단지를 다녀오는 길입니다.

왕복 2시간 거리지만 꽃을 즐겨야 하니 3시간 잡는 게 좋습니다.

 

연꽃단지는 지촌천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습니다.

한여름에는 활짝 핀 연꽃이 수만 평의 호수를 가득 채웁니다.

나는 아득한 꽃에 취하고 향기에 취합니다.



꽃을 보러 정원으로 가지 마라.

그대 몸 안에 꽃 만발한 정원이 있다.

거기 연꽃 한 송이가 수천 개의 꽃잎을 안고 있다.

그 수천 개의 꽃잎 위에 가만히 앉으라.

수천 개의 꽃잎 위에 가만히 앉아서

정원 안팎으로 가득한 아름다움을 보라.

시인 까비르는 이렇게 노래했지만 연꽃이 만개하는 7월말, 8월초에는 연꽃 정원에 꼭 가야 합니다.

거기 수백만 송이 연꽃이 수천만 개의 꽃잎 위에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연꽃은 떨어졌지만 가을날의 연꽃 정원도 찬란합니다.

 

그곳을 지나 야생화단지로 가는 길은 숲과 물이 바짝 붙어 동행합니다.

문명의 흔적과 소음이 없는 이 길은 대한민국 북한강 물길의 백미일 것입니다.

어느 날 저녁 야생화단지에 들어서니 이동원의 '이별노래'가 흐릅니다.

나는 꽃과 노래에 잠겨 눈을 감습니다.

 

이곳을 일군 동그래마을 촌장은 야생화에 '미친' 분입니다.

연꽃단지를 일군 분은 연에 '미친' 분입니다.

두 분 모두 외지인인데 화천군을 설득해서 10여 년 동안 이 단지를 만들고 가꿨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아주 친합니다.

서로 통하는 데가 있나 봅니다.

요즘 야생화단지는 공사 중이라 조금 어수선합니다.

얼른 공사를 마치고 고즈넉해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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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길

나는 강길 산길 들길 꽃길을 매일 하나씩 골라 걷습니다.

이 길은 모두 집에서 오고 가기 좋은 길입니다.

 

언제나 동행할 수 있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길입니다.

물론 이 길 말고도 빼어난 길이 많습니다.

 

화천은 산 첩첩 물 겹겹이니 어디를 가든 산이고 물입니다.

어디로 가든 산길이고 물길입니다.

 

북한강 윗쪽 화천댐 아래쪽 춘천댐 사이의 큰 물줄기를 따라 걷는 길만 '산소 100리길' 40km입니다.

강길과 꽃길도 이 길의 일부입니다.

 

나머지 100리 산소길 중에 물위에 길을 얹은 '리버 워크'도 있습니다.

내가 처음인 듯한 원시의 숲도 있습니다. 이런 길을 걷지 않으면 길에 대한 실례입니다.

무례입니다.

 

이 가을, 당신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싶습니다.

이 길에 예의를 다하고 싶습니다.

예를 다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천천히 걷습니다.

즐겁게 걷습니다.

마음 놓고 걷습니다.

걷기 위해 걷습니다.


[머니투데이 김영권작은경제연구소 소장][[웰빙에세이] 가을날의 산책, 걷기 위해 걷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