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내 생애 최대의 사치와 행복 본문
세상이 온통 어수선했던 그때 1979년이 지나 80년대로 들어서던 때
흔히들 말하는 질풍노도의 시간을 대한민국도 보냈던 시기였었고 나 자신 역시 그랬었다.
부유치 않았던 가정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내 유년부터 청소년기를 넘길 때 까지
소위 오직 시간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먼저 선점한 인간들에 의한 폭력적인 것들까지 합해
온통 부정적인 불만과 문제 투성이로 살았었고 언제 터져 뛰쳐나갈지 모르는 화약고로 살았던 것 같다.
군입대 후에도 원래가 유순한 성격이었음에도 이유 없는 괴롭힘과 폭력에 시달렸었고
실행에 옮기지 않고 참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내면엔 언제나 대형사고를 치고 싶어했었다.
내 인생 최대의 지랄같기만 했던 그런 시기에 역설적이게도
내 생에 최고의 행복감도 같이 느끼곤 했었던 것 같다.
빡빡머리 학창시절 매일 몽둥이 기합에 시달리면서도
음악을 알게해줬던 시기임에 그나마 지금도 감사하게 느끼고 있으니까 말이다...
오로지 음악 하나 외에는
내 유년시절부터 사춘기까지가 암울했던 어두운 터널을 완전히 빠져 나갈 때 까지
꿈도 희망이나 미래 같은 것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 같다.
얼굴을 크게 다치기도 했었던 때 험악해 보이는 상처로 인해 입대가 거절될까봐
서둘러 머리 빡빡 밀고 입대를 서두르던 시기
첫사랑인지 뭔지 그 여자에게서 느낀 눈치로(?) 미리 고무신 거꾸로 신더라도 괜찮다면서 떠났었다.
입대 얼마지나지 않아 사고로 대통령이 바뀌고 국가적으로도 비상이 선포되면서
부대 내에서도 전쟁이 시작 되려나 싶게 완전무장한 채 트럭 뒤에 쪼그려 앉아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래 차라리 이런식으로 선임자들에게 시달릴바에야
전쟁이 터져 미치도록 날뛰다 죽는 게 더 낫겠다 싶기도 했었다.
미2사단 군악대로 전출을 가고서부터는 내 군생활 최고의 행복감을 맛보았던 것 같다.
그 전에 다른 부대에 있었을 때 본의 아니게 순전히 타의에 의해 유치장에 세 번 갔었는데
그때마다 여자 친구가 면회를 왔었다.
여자 친구였긴 하지만 정확히 말해 사귀는 여자 친구도 아니었고 내 애인이 될 가능성도 없었을
내 의도로든 그 친구의 속마음이었든 가능성이 없었을거다 싶지만 어쨌거나
그 친구가 부대에 면회를 왔던 날 부대원 전체가 난리가 났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 친구는 키가 168 정도 됐었고 붉은 빛이 도는 미니스커트에
기다란 말장화 그리고 베레모를 쓴 갓 스무살을 넘긴 그야말로 한송이 꽃이었으니까 말이다...
고무신 거꾸로 신었을 거라고 믿었던 여친 말고는 애인이 없었다고 했다가
그 친구가 나타났으니 거짓말 했다고 소개 안 시켜줄 계획이었다고 쥑싸게 얻어 터졌으니...
하기사 나라도 군대 면회온 여자와 외박까지 나가는데
애인 아니라면 누가 믿을까만...
우여곡절 끝에 외박을 나가게 됐는데
당시 그 친구는 나보다 더 윗지방의 부대에서 근무하는 남자 친구를 면회가는 중이었는데
내가 그랬다...
"야! 너 오늘밤 나랑 같이 자자~"
"왜?"
"단 하룻밤만이라도 이 지랄같은 군대생활과 선임자새끼들 뵈기 싫어서 그래~"
"그래? 그럼 그러지 뭐,"
별 거창한 이저런 이유도 변명도 필요없이 그 친구랑 하루 같이 지낼 수가 있었던 이유는
당시 우리들은 캠핑을 가거나 자취방에서 어울려 놀다가 잠을 잘 때도
추울 땐 남자들은 이불 맨 바깥이어야 했었고 여름에는 남자들이 안쪽에서 자야했는데
남녀유별입네 어떻네 저떻네 할 아무런 거리낌도 없을 정도로 서로 믿고 편하게 지내던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친구가 날 이상하게 느꼈다면 난 그런 부탁 아닌 부탁같은 것도 아예 하지 않았을테고
그 친구도 나를 제대로 믿거나 알지 않았다면 이상하게 생각하여 거절했거나 변명을 했을 것이다.
밤이 되어 외박허가를 받은 후 여관으로 가던 중 미군과 조를 이룬 카투사 헌병고참을 만났었는데
어디 가느냐고 묻는 검문에 외박 가는 중이라고 했으면 되는데 당황하여 그만 면회온 친구 배웅하러 가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었다.
내 부내의 개 같은 선임병들이 군인의 외출 허용시간을 넘기면서까지
붙잡고 음흉한 질문들을 하면서 괴롭혔던 바람에 상당히 늦은 시간에 부대를 나섰기 때문인데
카투사 헌병도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장난삼아 우릴 괴롭히려던 거였다.
그 친구는 여관으로 올라갔고 나는 부대 유치장으로 잡혀가서
근부병한테 거짓말 했다는 명목으로 기합을 받다가 한참을 지나 보내줬었는데
당시 헌병에게 붙잡힌 후에는 즉시 부대로 귀대하여 보고를 해야 하는데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곤 하는 내 성격이지만 순둥이들이 갈등 끝에 사고를 친다고
그냥 여관으로 가버렸던 것이고...
먼저 씻고 예쁜 속옷차림으로 누워있던 그 친구 곁에서 밤 새 끙끙거리며 고민했었는데
지금이라도 부대로 돌아가서 보고를 해야하나 그냥 둬버리나 고민을 하던 중
그 친구 왈!
"야! 넌 나같은 이리 괜찮은 여자가 속옷 차림으로 누워있는데 어쨰 거들떠도 안 보냐?"
"어? ... 마 됐다 고마 자라~"
단 두마디만 서로 건넸을 뿐...
그밤 피가 끓을 청춘의 나이에 군이라는 특수한 집단에 갇혀
치마만 둘러도 여자로 본다던 시기임에도 난 그냥 아무말도 행동도 앉은 채 하룻밤을 무사히(?)넘긴 것이었다.
그때 그 친구도 나를 괜찮은 친구로 기억할테지 남자답지 못하다고 하진 않았을거라고 믿는다.
그 후로도 그 친구는 두 번을 더 면회를 왔었고 난 그때마다 아이러니하게도 헌병대 유치장에 잡혀 있었는데
면회를 왔다간 그 친구의 쪽지에는 명복을 빈다 라고만 쓰여있곤 했었다.
그때 왜 난 그친구를 여자로 느끼질 않고 친구로만 느꼈던 것일까?
다 늙은 지금의 나이에도 그런 경우였더라면 따귀를 맞더라도 뭔가 행동을 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지...
내가 결정을 하고 내가 한 말이나 저지른 행동 하나하나에 대한 모든 것들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가 되고서
최악의 힘든 시기를 겪으면 어떤 고통에 찬 결정이었든 언젠가는 이라는 희망으로 견디며 넘기게 되었고
상처 투성이로 남겨졌든 회복불능의 결과가 남겨졌더라도 죽기 전엔 반드시 헤쳐나왔고
그렇게 한 연후엔 반드시 내 자신에게 선물을 하는데 그건 내 인생 최고의 사치와 행복감이었다.
사람들은 그런다.
사치고 낭비라면서1,000km 가는데 수십 일이 걸린다는 건 이런 시대에 살면서 사치이고 낭비의 무모한 짓이라고...
잠시였든 영원히였든 당시의 나는 다 버린 후 걸어서 그런 길을 걸어다녔다.
그게 내 생에는 최고의 사치였고 무한한 행복이었으니까...
최악의 시기를 겪고난 후
걸어서 매달 1,000km정도를 미치도록 걸어서 다니면서 지랄같았던 그런 시기를 헤쳐나왔기 때문이다.
사람이 느릿느릿(?)해가 떠 있는 낮동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가 대략 40km정도 된다.
스페인어로 힘 든 길을 카미노 두로(Camino duro) 라고 하는데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걷는 것을 싫어하고 그런 먼 길을 수십 일 동안 걸어서 간다고 하면 미쳤다고들 한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다들 가지지 못하면 불안해(?)하는 것들
흔히들 유행을 뒤따르는 것
나는 그런 모든 것들을 매사에 피하기도 하고 유달리 싫어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뭐 딱히 치별을 원하거나 특별해 보이고 싶어하고 튀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다.
내 생에 최고의 사치와 행복을 느껴본 지가 십 년이 지났다.
미치도록 하말라야 산골 마을들의 길을 걸었었고 혼돈의 인도를 보고 다니면서 산티아고 순례의 그 길들 위에서...
곧 나는 또 내 인생 최고 최대의 행복함을 만끽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언젠가는 이라는 시간 속에 갇혀 개처럼(?)살아가지만
어차피 내 인생이고 내 삶인 것을 내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겠지,
머잖아 난 정승처럼 사치를 부려가면서 행복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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