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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은지심

편백나무 원고지 편지지 그림엽서 도화지

까미l노 2017. 7. 2. 22:46



편백나무를 가로 방향으로 절단하면 아무리 잘 건사해도 갈라지기 마련이다.

세로로 잘라서 실내에서 오랫동안 말리면 천천히 편백의 진액이 휘발되면서

마르는데 다듬은 후 편지지처럼 원고지처럼 그림엽서처럼 그림그리는 도화지 처럼 사용할 수 있다.


숲에 시를 적기도 하고 그림도 그려 나무의 이야기를 적어 매달기도 한다.

작은 가지는 편백피리로 만들기도 하고 목걸이 찻잔 받침 같은 것을 만들기도 한다.


나무의 가운데 붉은 부분은 편백의 진액이 뭉쳐있는 것인데

소나무에 상처가 생기면 스스로 치료를 하기 위해 송진이 스며 나오듯

편백나무도 상처가 있는 곳에 진액이 몰리기도 하고 외부의 어떤 위험 같은 게 생겼을 때

한 두 가지에 집중적으로 진액을 몰리게 하여 스스로를 보호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붉은 부분의 냄새를 맡아보면 피톤치드 라고 하는 편백나무 특유의 향이 진하게 나는데

아주 피빛처럼 붉은 가지에는 약간 매콤할 정도의 편백향이 나기도 한다.


실내에서 말리다 보면 가장자리에 노란 빛깔의 진액이 스며 나오는데

바로 상처난 부분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사람의 피부에 상처가 생기면 진물이 나오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제주의 숲엔 흙이 적어 바위와 돌 사이에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뿌리가 깊지 못해 태풍이 불면 아름드리 편백이라도 곧잘 쓰러지곤 한다.


내 작업실과 방안은 온통 편백향이 짙어 이제는 내 코가 취해서인지 잘 모를 정도가 되었다...





배 고픈 보고픈 슬픈 헤픈 ...

요즘엔 웃기는데 슬프기도 해서 웃픈이라는 표현도 있고

숲이 그리워서 숲픈 이라는 표현도 생겼다.


뭐, 술이 늘상 그리운 사람은 술픈 이라고도 해야겠지만....


세상에 와서 뭐했냐 그러면 암 것도 안 했다 그래야할테고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원해서 온 게 아니라고 우문에 우답이니 선문답처럼 해야겠지...


낮에 숲픈에서 바람결에 이리 저리 나무들 사이를 마구 휘젓고 다니던 안개를 보면서

나 세상에 와서 다행인 거라도 있을까 싶어 곰곰거려봤더니 니가 있어 그가 있어

참 다행인 삶을 살았었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남의 밥상에 숟가락 슬쩍 걸치듯 될테지만

니도 그도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만

곁에서 지켜보는 내 눈에 니가 있고 그가 있어서

내 삶에 니를 만나고 그를 만나서 그나마 참 다행이다 싶다...


살아있은 게 그다지 나쁜지만은 않았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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