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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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엔 까미노

비오는 날은 만리장성을 걷지마라

까미l노 2015. 2. 14. 12:40

 중국 트레킹 9] 2010년 4월 5일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성벽 길은 다 허물어졌다. 수백 년의 세월이 그냥 묵묵히 흘렀을 리는 없을 터. 모진 비바람이 부는 날이 있었을 테고, 거친 눈보라가 치는 날도 있었을 것이다. 햇빛이 타는 듯이 내리 쬐이기도 했을 테고, 음습한 안개가 산 전체를 품어 안기도 했겠지. 번개가 번쩍이기도 했을 것이고, 벼락이 내려치기도 했으리라.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처음에는 돌을 차근차근 쌓아 올려 계단을 만들었던 곳이 허물어지고 무너지고 스러져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이 허물어진 성벽이 내게는 넘을 수 없는 견고한 성벽이 되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이 성벽을 올라가야 트레킹을 계속할 수 있으니 말이다.

가장 먼저 마지막 난관이라는 이 성벽 앞에 도착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90도에 가까운 성벽의 기울기도 문제였지만, 성벽의 가장 윗부분이 거의 절벽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 뿐인가. 그 부분은 손만 대면 그대로 부서져 내릴 것 같은 형태의 돌이었다. 그러니 그 부분이 절벽처럼 변했겠지만 말이다.

잡을 곳도, 짚을 곳도, 디딜 곳도 없고 손을 대면 부서질 것 같은 곳을 어떻게 올라간단 말인가. 억지로라도 그곳에 올라가려면 암벽등반용 도구가 필요할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트레킹을 하러 왔지 암벽등반을 나선 것이 아니니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방금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고, 다시 앞을 올려다보기를 여러 번.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도 더 이상 앞으로 가는 건 무리였다. 아니, 불가능했다.

저길 우찌 올라간다냐. 나, 죽어도 못 가.


다리가 후덜덜 떨린 것은 그런 생각을 굳혔을 때였다. 뒤따라 올라온 일행 둘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저기, 못 간다. 다른 여자 일행들을 챙기느라 뒤처진 남자 일행들이 올라오면 어떻게든 올라갈 방법을 찾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우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장 먼저 올라온 남정네는 자연과 사람. 이 남정네, 우리의 앞을 가로막은 성벽 길을 보더니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저거, 우리 못 간다. 절대로 못 간다.


얼굴 표정이 심각하게 변한 그가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기어 올라오고 있는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남자들, 배낭 놓고 올라와 봐. 여기 못 간다.


두 명의 남자 일행이 그 소리를 듣고 배낭을 내던진 채 빠른 걸음으로 우리가 있는 곳까지 올라왔다. 우리의 앞에 펼쳐진 절경(?)을 본 두 남정네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쉽지 않겠는 걸. 일단 블랙맨이 먼저 올라가서 간(?)을 보기로 했다. 그가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졸아든다.

문제의 절벽 같은 부분에 도달한 이 남정네, 못 올라간다고 손사래를 치면서 소리를 지른다. 올라갔으니 도로 내려오기는 해야 하는데, 내려오는 모습이 어째 위태로워 보인다. 저러다가 그냥 굴러 떨어지는 거 아냐?


그 때, 뒤에서 처졌던 중국인 현지 가이드가 올라왔다. 가이드는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성벽을 보고도 표정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강력히 주장했다, 위험해서 도저히 못 올라간다고. 한데, 이 가이드는 갈 수 있다고 하는 거라. 그것도 별일 아니라는 기색으로. 가이드야 한두 번 와본 것이 아니니 갈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문제는 우리 일행이었다. 겁을 집어 먹은 것이다. 만리장성까지 와서 목숨 줄 놓을 일이 있느냐, 이거지.

그래, 우리 못 간다.


결론은 간단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건데, 허거덕 혹은 아뿔싸. 조금 전에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온몸을 다 던져서 결사적으로 올라온 길을 내려다본다. 아찔하다. 내려다보기만 해도 아찔한 저 곳을 다시 내려간다고라? 일행 중 누군가 말했다.

못 내려가. 못 가. 차라리 올라가는 게 낫지.


현지 가이드에게 물었다. 내려가는 것과 올라가는 것 중 어느 게 더 위험하냐고? 당근 내려가는 것이란다. 절대로 못 간다, 아니다 내려가는 게 더 어려우니 그냥 가야 한다, 싫다 나는 죽어도 못 간다... 의견이 봄날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 잎처럼 난분분 흩어진다.

나, 입으로는 절대로 혹은 죽어도 못 간다고 외치면서 목에 걸고 있던 카메라를 배낭 안에 쑤셔 넣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올라가든 내려가든 이 위험한 길에서 카메라가 거치적거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다른 일행들도 선글라스와 모자 등이 거치적거릴지도 모른다면서 배낭 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다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중단 없는 전진’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리라.

중국인 현지 가이드가 갈 수 있다고 했으니 그를 앞장 세워서 따라가 보자, 고 결론이 내려졌다.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게 전문가(?)의 견해이니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의 선택을 따를 수밖에. 

 

 

현지 가이드 뒤를 가장 먼저 따라가는 일행에게 현지 가이드가 어디를 어떻게 딛고 올라가는지 잘 보고 그대로 걸음을 옮기라, 는 지시가 떨어졌다. 여자들이 먼저 가이드를 따라 출발했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자들 사이로 끼어들었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성벽에서 돌이 튀어나온 곳을 찾아 발끝으로 하나씩 디디면서 올라갔던 것 같다. 발 하나를 온전하게 밟을 수 있을 만한 크기의 돌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저 발을 디딜 수 있고 손으로 잡을 수 있다면 힘주어 밟고 잡았을 뿐. 어느 돌을 밟아야 안전하게 오를 수 있을까, 만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기어 올라가니 위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다 왔어, 여기가 끝이야.

정말? 하면서 고개를 들어 보니 너른 공간이 눈에 확 들어온다. 거의 절벽처럼 보이던, 만지면 부스러질 것 같은 벽면에 그나마 디딜 공간이 조금이라도 있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곳을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길 끝에서 일행이 손을 내밀어 나를 너른 공간으로 확 끌어 올렸다. 다 올라왔다, 그것도 살아서.

뒤로 처졌던 일행들이 한 사람씩 상기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지막 일행까지 무사히 올라왔다. 중국인 현지 가이드의 말이 맞았다. 갈 수 있는 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위험한.

나중에 알고 보니 만리장성 첸코우 구간은 출입금지 지역이었다.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에서 출입을 못하게 하는데 관광객들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관광객이 문제, 라고 하겠지만 더 큰 문제는 이 구간 아래 마을 사람들이다. 이 마을 사람들이 관광객들에게 입장료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입장료는 받되 사고가 나는 건 관광객 본인 책임이라는 의미겠지.

 


위험한 구간은 우리가 지나온 곳 말고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 구간은 산길을 에둘러서 갈 수 있기 때문에 가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조금 전에 올라온 구간은 샛길이 없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이 지나와야 했던 것이다.

위험한 구간을 벗어났다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성벽을 둘러보았다. 능선을 따라 허옇게 이어진 성벽은 한 마리의 굵고 긴 뱀 같았다. 저 성벽을 쌓으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끌려왔을까? 성벽을 쌓은 이들은 아마도 대부분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었으리라. 어느 시대에나 그런 사람들이 희생양이 되기 마련이니까. 성벽을 쌓다가 돌에 깔려 죽은 이들도 셀 수 없이 많으리라. 성벽을 쌓다가 도망친 이들도 많겠지.

 

북경결 성벽 길 세 갈래가 한 곳에서 만난다는 북경결에 도착했다. 소나무 한 그루가 기품 있게 서 있다. 이제 더 이상 어렵고 힘든 구간은 없다, 는 게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그 말은 대충 맞았다. 이따금 성벽 길을 벗어나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기도 하고, 미끄러져서 내려오기도 하면서 걸었다. 4월 초순이지만 눈이 채 녹지 않은 길도 있었고,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길도 있었다. 진흙탕으로 변한 비탈길을 내려가다가 엉덩방아를 찧어 미끄러져 바지가 흙으로 뒤범벅이 되기도 했다.

처음 조씨산장에서 성벽을 향해 출발할 때는 우리 일행밖에 없었지만 북경결을 지나면서 이곳을 찾은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부분 중국인들이었으나, 서양인들도 몇 명 있었다.

이곳에서 얼마 전에 영국인 유학생 커플이 사망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두어 주일 전이라고 하던가. 그들은 비가 오는 날, 이곳을 찾았다가 벼락을 피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이 지역이 위험한 구간이라는 이야기겠지.


비 오는 날, 만리장성에 가지 마라. 죽을 수도 있다.

 

* 이 도보여행은 도보모임 <카미노 도보여행> 회원들과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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