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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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엔 까미노

만리장성의 하이라이트 첸코우를 가다

까미l노 2015. 2. 14. 12:41

[중국 트레킹 8] 2010년 4월 5일

만리장성 트레킹을 하는 날, 하늘 맑고 푸르다. 햇빛은 따사롭고, 기온은 약간 쌀쌀한 편.

아는 게 병이고, 모르는 게 약이라고 했던가. 오래전에 만리장성을 둘러본 적이 있었기에 그냥 성벽을 따라 길이 이어지고 계단이 이어지니 그 길을 쉬엄쉬엄 걸으면 되리라, 고 쉽게 생각했다. 규모는 다르지만 우리나라의 남한산성, 수원화성, 서울성벽 길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 길들, 가끔은 힘든 구간이 나오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산책을 하듯 걸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한데 어째 북경에서 우리를 안내한 조선족 가이드 김영표씨의 말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늘 우리가 걷는 곳은 ‘만리장성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가장 험한 구간인 ‘첸코우(箭扣长城)’. 만리장성은 진시황 때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가 가는 곳은 명나라 때 쌓은 것으로 쌓은 뒤 단 한 번도 보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가이드는 만리장성의 전체 길이는 6350km에 달한다고 했다. 물론 여러 갈래로 나뉜 지선까지 포함된 길이, 라고 했다.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쌓았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그 이전인 춘추전국시대부터 축성이 시작되었다. 진시황은 진나라를 세운 뒤, 북쪽의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이미 축성된 성벽을 연결하고 일부는 증축을 했다고 전해진다. 진시황 이후 들어선 왕조들도 성벽을 쌓았다. 특히 명나라는 대대적인 개·보수를 해서 지금의 만리장성의 모습을 갖추게 했다는 것.

만리장성의 효용성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명나라를 이어서 들어선 나라는 청. 북방민족인 만주족이 굳이 북방을 경계해야 할 이유는 없었으리라. 청 왕조는 만리장성이 군사적인 효용가치가 없다고 판단, 방치한다. 군사적인 가치가 사라진 만리장성은 시대가 변하자 이번에는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된다. 관광 상품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세계 각국에서 엄청나게 많은 관광객들이 만리장성을 보러 중국을 찾는다니, 중국은 선견지명(?)이 있는 조상 덕을 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호텔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버스를 타고 북경을 출발, 두 시간 가량을 달려 도착한 곳은 조씨산장. 첸코우에 오르는 사람들은 이 산장을 거쳐 간다고 했다. 하긴 가는 길목에 있으니 원하든 원하지 않든 조씨산장을 볼 수밖에 없겠다.

이 집, 안나푸르나에서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와 상당히 비슷하다. 조씨산장으로 가는 길목에는 옥수수가 가득 쌓인 나무로 지은 창고가 있다. 산장의 안마당 역시 옥수수를 잔뜩 말리고 있어서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주식은 쌀이 아니라 옥수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우리 일행의 만리장성 트레킹에는 세 명의 가이드가 따라 붙었다. 조선족 가이드는 김영표씨 외에 여자 가이드가 한 사람 더 왔는데, 40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이들은 ‘첸코우’를 한 번도 오지 않아 처음 가는 길이라고 했다. 대신 첸코우를 손금 들여다보듯 훤하게 잘 아는 현지 가이드가 함께 간단다.

현지 가이드는 ‘조씨산장’집의 아들이었다. 30대 후반이거나 40대 초반은 되어 보이는 중국인이었다. 조씨산장은 첸코우를 찾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만리장성 길을 안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 첸코우는 미로처럼 얽혀 있는 길이라서 능숙한 현지 가이드가 필요하다는 건데, 직접 올라가보니 가이드 없이 올라온 사람들이 더 많았다.

중국인 현지 가이드를 따라 만리장성 성벽으로 이르는 산길을 올라갈 때만 해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산길은 지난 가을에 떨어진 마른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어서 폭신했다. 4월이지만 겨울은 아직도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부는 바람이 쌀쌀했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길을 따라 걸었다.

우와, 저것 좀 봐.

 

 

 


누군가 산 위를 올려다보면서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능선을 따라 끝이 보이지 않는 성벽이 길게 이어져 있다. 얼마나 긴지 도무지 길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얼른 성벽에 닿고 싶어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성벽은 능선을 따라 쌓여 있어서 그리 높아보이지는 않았다. 험한 산에 쌓은 성벽이니 천혜의 요새 역할을 하겠지만 능선 아래가, 성벽 아래가 절벽인 점을 감안한다면 어떤 적이라도 이곳을 통해서 공격해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성을 쌓아놓고 단 한 번도 보수를 하러 오지 않았겠지.

 


성벽에 도착하니 멀리서 볼 때와 달리 허물어진 곳이 많았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더니, 성벽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몇 백 년의 세월이 흐르다 보니 부서지고 무너지는 것이야 당연하지 않을까. 아무리 긴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저 정도로 온전하게 모습을 남기고 있다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멀리서 볼 때는 완만한 능선을 따라 성벽이 이어진 것 같았는데 막상 와서 보니 가파른 구간이 제법 많다. 가파른 만큼 세월의 풍파를 더 많이 겪었는지 이런 구간은 대부분 많이 허물어져 있었다. 돌로 계단을 쌓았던 곳은 일부만 남아 있기도 했다.

 


성벽을 따라 걸으면서 틈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벽은 능선을 따라 끝을 알 수 없게 이어지고 있었고, 보이는 경치는 감탄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둘러보고 또 둘러보아도 산이었고, 성벽이었다. 이 정도 길이라면 충분히 즐거운 마음으로 걸을 수 있어, 했다.

하지만 산 너머 산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만리장성의 하이라이트’라는 말이 폼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가장 먼저 만난 것은 높은 담이었다. 물론 성벽이었는데 높은 담처럼 우리 일행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성벽 위를 올라가야 길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나처럼 키가 작고 다리가 짧은 사람은 혼자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장벽이었다. 담 같은 성벽 위는 한 사람이 겨우 버티어 설 수 있을 만한 공간만 있었다. 성벽 옆은? 당연히 낭떠러지. 그 위에 올라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자칫하면 만리장성을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불귀의 객이 될 수 있다. 남정네들이 유격훈련을 받듯 먼저 성벽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들이 여자들을 위로 끌어올리기로 한 것.

담처럼 가로막은 성벽에 발을 디딜 공간이 없어서 일방적으로 끌어올려져야 했다. 팔이 죽죽 늘어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겨우 상체를 성벽에 걸치고, 다시 끌어올려져 성벽 위에 섰다. 허거덕, 천 길 낭떠러지가 따로 없네. 중국에 와서 천 길 낭떠러지 원 없이 본다.

후덜덜, 다리가 떨린다. 얼른 성벽을 따라 올라가 안전지대로 내려선다. 일단 올라오고 나니 안도감이 밀려온다. 다른 사람들은 어찌 올라오나, 내려다보니 끌어당기고 밀어 올리고 있다. 가이드 빼고 우리 일행은 전부 열 명. 결국 두 명이 겁을 먹고 성벽을 올라오지 못했다. 꾸요 언니가 고소공포증이 있다면서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만 것이다. 가이드 김영표씨가 두 사람을 따라 내려갔다.

나머지 사람들을 성벽 위로 끌어올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경사가 거의 80도는 됨직한 가파른 성벽 길을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은 일부만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발을 딛고 올라 갈만 했다. 경사가 너무 심해 두 손도 계단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발을 잘못 디디거나 미끄러진다면 사고가 날 위험이 큰 길이었지만 차근차근 걸음을 옮기니 아래에서 올려다 볼 때보다는 겁이 나지 않았다. 마치 암벽등반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손가락장갑을 낀 손은 먼지투성이였고, 옷도 마찬가지였다. 흙무더기에서 한바탕 구른 것 같은 행색이었다. 가파른 첫 구간을 오른 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두 번째 구간도 기어올랐다.

처음이 힘들지 두 번째는 한 번 해봤다고 처음보다 올라가기가 수월했다.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도전해 주지, 뭐 이런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한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코스가 나를,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성벽을 붙들고 일행을 끌어올리는 모습을 아래에서 지켜보는 중. 성벽 옆은 낭떠러지.

* 이 도보여행은 도보모임 <카미노 도보여행> 회원들과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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