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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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은지심

남자가 사랑한 마르코폴로 꽃

까미l노 2015. 1. 22. 12:59

 

올해 제주의 겨울은 유달리 비바람 매서운 날씨가 고약하게 심술을 부리는 연속이다.

겨울이지만 따뜻한 햇살에 노근하게 몸이라도 말리고 싶은데 몇날 몇일을 그러지 못했는데

오늘 아침엔 먹구름이 잔뜩 낀 채 날궂이를 하더니 갑자기 무지개가 떴다.

 

마르코폴로꽃은 원래 우리나라에는 없었전 종 같은데 백합보다 꽃이 더 크고 색깔도 흰색이 아니라 화려하다.

 

소설 속의 화자인 남자는 여태도 꽃집이 보이면
어김없이 그를 반기던 '마르코폴로'꽃을 찾고 있을까...

 


화장실 변기에서조차 꼭 안고 어루만지던 그 꽃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을 때면 차라리 청소를하는 그는 독신자이다.

 


근본적인 우울증도 없고 대체로 평화롭고 건전하고 부지런하다.

그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도 선택한 것들의 결과에 대해서도
좀처럼 후회하는 짓 따위도 않는다.

 

알코올 중독 증세도

밤마다 여자를 찾아헤매는 나방병도 없거니와
마약이나 도박에도 빠지지 않거니와 심지어는 술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

 


빚도 없고

위염이나 위궤양도 앓지 않았고 성병도 걸리지 않았다.

집 안에 들어서면 늘 깨끗하게 청소를 한다.

 


목욕탕 거울에 비누나 치약 거품이 튄 것이 보이면 즉시 닦아낸다.

그런 그도 매달 찾아 오는 이십오 퍼센트의 고통이 있는데
마치 여자들이 생리하는 것처럼 어김없이 찾아드는 고통...

 


그게 나머지 칠십오 퍼센트에 비해 관대할 정도로 짧지만
그의 생활 전체를 압도하는 고통이어서 심도로는 칠십오 퍼센트와 맞먹는다.

 

그는 낙천주의자 라서 열 가지 중 한 가지만 좋아도
아홉 가지 고통을 괘념치 않고 한 가지만을 즐긴다.

 


고통에 대해 괘념치 않으니 최소한 감정적이 되지 않고 단지 불편할 뿐

그런데 여자가 없는 걸 상상 이상으로 괴로워 한다.
배출 욕구를 못 이겨 자위행위를 하는 짓 따위는
나이 들 수록 스스로에게 민망하기 짝이 없으니...

 

 

그의 경우는 늘 그렇단다...


여자들이 없을 때는 한 명도 없다가 있기 시작하면 한꺼번에 줄을 지어 오게 된다고
독신이라서의 시스템적 장애 때문으로 생각한 그는 없을 때는 없기 때문에 결정할 수 없고 여럿일 때는
여럿이기 때문에 결정할 수가 없어서 그럴 것이라는...

 

 


그 남자가 사랑한 꽃 '마르코폴로' 처럼
나도 그냥(?) 좋아하다가 헌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가 싫어서

인도에서 날아온 야자수 쪽박에다 커피를 타 마신다. 

 

나는 칠십 오 퍼센트의 고통보다

이십 오 퍼센트의 과정을 잘 견디지 못하면

이십 육 퍼센트 부터는 없어져 버리는 병을 가졌다. 

 

 

누가 나에게 바다엔 뭣하러 가느냐고 묻는다면
보통의 남자들은 겨울바다에 종종 가방을 버리기 위해 간다는데
나는 외로움 속으로 성큼 더 깊이 들어가는 거라고 말한다. 

 

"아마도 우리는 날개를 버리고 자신을 띄우는
부력조차 억누르고 사람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가을산 억새밭에 흩날리던 안개 알갱이에 흠씬 젖은 몸을 씻기 전 화장실에 앉아

-전경린 의 소설 '물의 정거장'을 읽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