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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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반데룽

후회할 일 만들지 않았던 다행을 후회한다

까미l노 2014. 12. 31. 17:04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아닌 이제는 웃으며 추억해 본다.

나에게도 지난 일 떠벌리면서 꽁트 꽤나 될만한 일이 있었던가를 곰곰 생각 해봤는데 굳이 떠벌릴 건 아니지만

지금으로 부터 35년도 더 훌쩍 지난 옛 일을 기억하면서 슬며시 썩은 미소를 지어 본다.

 

남자들이 하는 말에 '차려준 밥상을 걷어 차면 안 된다' 라는 우스개 말이 있다.

여성들이 들으면 싫어할테고 그 친구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을거다만 누구라고 지칭할 것도 아니고 여성을 비하할 생각은 없다.

 

35년도 더 넘게 흘러간 시간이 됐네...

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터질 무렵이었으니 나도 꽃다운 나이였을 군 생활 시작 갓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있었던 때

미육군을 지원하는 카투사로 경기도 문산의 모 미군부대에 근무를 했을 때였다.

 

공수부댈 지원했다가 당시 53kg였던 몸무게로는 낙하산 방향타 조절이 불가능하단 이유로 거절을 당하고

수도경비 사령부 군악대로 오라던 선배들을 뿌리 치고 우여곡절 끝에 평택 카투사 교육대를 거쳐 문산으로 가게 되었는데

 

평택교육대에서 마지막 영어시험을 통과하고 자대 배치 때 키가 적당해 카투사 헌병으로 차출이 되었다길래 그런줄 알고 있었는데

자대로 출발하는 날 차출 담당 기간병이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졸다가 한 칸씩  내려 적어 그만 내 자대가 엉뚱한 곳으로 변경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가 보다 하고 간 곳이 문산에 있던 땡땡 미군 캠프였다. 

그곳 부대가 나와는 인연이 없어서 였다고 하기엔 변명조차 되지 않을 것 같고

당시의 모든 젊은이들의 군생활이 참으로 고달팠었는데 그나마 최고 좋다던 미군 부대였던 카투사였던 게 

오히려 쫄병들에겐 더 고달팠던 이유가 각자의 방이 따로 있었기에 드러나지 않는 폭력이 더 심했었다.

 

고참들 드러내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언제나 생긴만큼 어둡고 차가워 보이는 내 특유의  썩소를 날리면서 군생활을 했기에

혹시 탈영이라도 할까봐서 나보다 이주일 먼저 입대했지만 지금도 친구처럼 지내는 선임병이

언제나 내 뒤를 따라다니며 감시 같은 보호를 했었다.

 

외모와는 달리 성격상 순하고 갓 입대한 쫄병이라 군기도 바짝 들어있었는데 어떻게 다양한 사고를 연속적으로 칠(?)용기가 났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싶은데 탈영은 아니고 휴가 또는 외출 후 제 시간에 귀대를 하지 않은 미귀를 한 열시간 정도 했었고

헌병대 유치장에 잡혀간 것이 세 번 정훈장교의 훈시 때 내 이야기를 하는 부대장 정면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었으니...

당시는 어디나 그랬을 테지만 부대 내 폭력이 많았던 시절이고 하루에 몽둥이 세대 정도 맞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면 엄청난 행운이었으니,

오죽하면 미2사단 (인디안 헤드 올림픽)전체 체육대회가 있었는데 대대본부 축구대표에 뽑혀 시합을 하다가 팔이 부려졌었는데

손목 부분의 기브스를  한달이 지나 거진 나아갈 무렵 몰래 외출을 나가(부상병은 외출 금지)철물점에서 줄톱을 산 후 기부스를 짤라버렸을까...

 

작대기 한개 군바리 외출 나가봐야 젊은 아가씨들 눈길 한 번 줄 리 없는데도 때 빼고 광 내 폼잡고 싶었고

아무리 악질 선임병들도 부상병은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부러졌던 팔이 다 낫지 않고 기브스를 좀 더 오래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중엔 미군 군의관이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잘 낫지 않는 체질인줄 알고 아예 손목에서 어깨 근처 팔 전체를 기역자로 기브스를 해버렸다.

샤워할 때 옷 갈아 입고 벗기가 불편해서 그렇지 선임병들에게 시달리지 않아서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고

 

기브스를 한 군인은 전쟁이 발발해도 사격을 할 수 없으니 볼펜을 들고 검문 검색 위주로 근무를 하는정문에서 위병을 섰었는데

흑인병사 백인병장 카투사 한명 한국인 아저씨 한명 이렇게 넷이서 밀수검색도 겸하는 근무였었다.

 

어느날 부대 전체 식당을 돌며 쓰레기를 수거하는 근처 농장의 트럭이 들어왔는데 그날은 내가 당번인지라  

트럭 조수석에 타고 부대 식당을 한바퀴 도는데 같은 한국 사람이고 통상의 관례상 쓰레기 수거차량을 철저하게 관리감시 하지는 않았기에

부대를 도는 스넥카에서 담배를 사서 오는데 마침 외출 나갔다 들어 오는 헌병 장교 보는 시선에는

 

쓰레기 수거 트럭이 서 있고 근처에 농장 인부 둘이 무언가 작업을 하는 모습에 어슬렁거리며 걷던 내가 가운데 보였던 것인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농장 인부들이 막사 근처에 잠시 내려놓았던 기중기 크레인을 쓰레키통에다 실었던 것이다.

 

그 그림이 헌병 장교의 눈에는 내가 저변을 살피고 인부들은 크레인을 훔치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쓰레기 수거를 마치고 부대 입구 정문으로 향하는데 미군 헌병들이 정문에 쫙 깔려 있었는데

전혀 아무런 영문을 모른 채 차에서 내렸더니 쓰레기 통을 뒤집어서 검색을 하겠다는 것이다.

 

쓰레기 통에는 엄청나게 굵고 긴 크레인용 쇠사슬이 실려있었고 따져 묻던 헌병에게 나는 재치 있게 대답한답시고(같은 한국인을 도와야 한다는)

대답을 제대로 못하고 얼버무리는 인부들을 대신해 쓰레기 옆에 있어서 가져가도 된다고 허락해줬노라고 해버렸다.

 

그길로 미군 헌병대로 잡혀갔는데...

현병대 사무실에도 카투사 헌병과 한국인 수사관이 함께 근무를 한다.

 

그들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후 아뿔싸 했지만 떄는 늦었고 군사재판에 회부될지도 모른다고 하길래

꽤나 소심한 성격이었는데도 무슨 똥배짱이었는지 별 생각도 들지 않고 그냥 무덤덤했었던 기억이다.

 

그런데 그때 예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그녀가 또 다시 나를 찾아 온 것이다.

당연 그녀는 나를 만날 수가 없었고 나 역시 그녀가 왔었다는 것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가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되었었는데

천리 먼길 진주에서 나를 면회왔던 그녀는 정작 나를 만나지도 못하고 남기고 간 쪽지엔 위로의 글 한 줄만 있었을 뿐...명복을 빌겠다고...

 

제일 처음 온 면회에서 나랑 동침하고 그 후  연속 세 번의 면회를 온 그녀

지랄맞게도 그때 마다 나는 헌병대 유치장에 있었던 것이었으니...

 

입대 후 3개월이나 지났을까 빡빡머리에 작대기 한줄 걸치고 문산에서 막 군생활을 시작할 무렵

카투사는 3개월만에 집으로 3일간의 휴가를 보내주었는데 휴가 전날밤에 대통령이 시해를 당했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던 셈이고...

 

그야말로 구두코에 파리가 앉을 엄두조차 못낼 정도로 광을 내고 바지에 칼주름을 막 세우려던 찰나에 대포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부대 내 대포소리는 비상이 걸릴 때 쏘는 예포인데 소리가 들리면 횟수를 세기 시작하는데 이게 한 두 번도 아니고 연속 세 번이 나는 것이었으니

 

네 번의 대포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고참병이 아니라 군생활을 수 십년간 했던 미군들에게조차 엄청 귀한 일인데

행운이 아니라 거의 전쟁발발 상황의 비상이 걸린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외출 외박 차 부대 밖으로 나갔던 미군들이 서둘러 귀대를 하면서 엄지 손가락을 보이면서 너희 보스가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처음엔 이자식들이 무슨 미친 소릴 지껄이는 것이냐 라고 웃었는데 뉴스엔 나오지 않았던 국내의 사건이 미군들에겐

즉각 CIA를 통해 실시간 알려지고 비상이 걸린 모양이었던 셈이다.

 

미군들 중에서도 그랬지만 신병들은 카투사 미군 할 것 없이 얼굴이 하얘지며 모두가 완전 쫄았던 것이다.

군인이긴 하지만 전쟁을 생각이나 해봤겠으며 총기와 가스마스크를 찾고 완전무장한 채 트럭 뒤에 올라는데

꿈인지 생신지 이길로 전쟁터로 가는구나 라고 생각하니 6,25전쟁의 영화장면 가족들 이저런 생각들로 정신이 까마득해지는 것이다.

 

비록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당시를 지금 생각해봐도 그 와중에 정신을 차려야 된다라면서 총을 이리 저리 만지며

사격을 하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됐었지 가스 마스크는 이상이 없을지 걱정하는 냉정함도 따랐었다 라는...^^

 

국내 상황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돌아가고 바깥 소식을 제대로 모른 채 흉흉한 소식들이 유언비어식으로 들리곤 했었다. 

수많은 날들이 지난 후 무사히 유야무야 비상상황은 끝나고 나는 드디어 첫 휴가를 나가는데...

 

 

첫사랑 그녀의 집으로 갔더니 입대 전 고무신 거꾸로 신을 줄은 짐작했었지만

그녀의 어머니 되시는 분은 나더러 저년 좀 패서 사람 만들어라 할 정도였고(난 그녀의 가족들에겐 교과서 같은 온순이라서 나를 믿으셨기 때문)   

긴 생머리는 퍼머로 단정하던 주름치마는 미니스커트로 메니큐어에 빨간 입술로 탈바꿈 되어버렸었다.

 

그녀는 내 생애 첫 아이를 가졌었다고 했었던 첫사랑이었다... 

 

다시 이야기를 얼마 전으로 돌아가서

같은 한국사람이라고 도와주려던 내가 곤경애 처했으니 쓰레기 농장 주인을 찾아가 지초지종을 물어 진술서를 다시 작성하려고 했었는데

그들이 그만 발뺌을 하면서 경찰서에 잡혀갔다는 것인데 당시 나보다 늦게 입대하여 후임이 내무부 치안 통신담당 근무를 한 경력으로

비상전화로 알아본 결과 그런 사람이 수사받기 위해 잡혀온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당신들 도울려고 했었던 같은 한국사람이고 아직 앞날이 창창한 젊은 청춘인데 아무 잘못도 없이 군법에 회부당하게 내버려둘 거냐고 따져

결국엔 내가 잠시 화장실 가는 사이에 몰래 크레인 줄을 훔친 거라고 다시 진술서를 받아 제출하여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런 시간 그녀는 나를 만나려고 천리길을 달려왔었고 니는 헌병대에 잡혀있어서 그녀가 명복을 빈다고 우스게 쪽지를 남기곤 했었는데

최초 맨 처음 그녀가 나를 면회왔을 때 부대가 발칵 뒤집힌 사건으로 시작을 알리게 되는데

위병 근무를 하던 선임병이 흥분된 얼굴로 엄청난 미인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를 면회 왔다고 알려 주는 것이다.

 

사귀던 년은 고무신 거꾸로 신었음을 알고 있거늘  도당체 무신 여자씩이나 나를 면회왔다는 사실이 믿기지도 았았고

게다가 미인이라며 미니스커트를 입었다기에 나를 찾아온 여자라면 미니스커트를 입을 리도(?)없었기에 더 믿을 수가 없었다.

긴가민가 하면서 정문으로 나가봤더니 이런...

 

예의 그녀가 빨간 베레모에 화려한 색의 미니 투피스를 입고 긴 가죽장화를 신은 채 나를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은 채 서있는 게 아닌가

나로서야 당연히 김이 셀 수 밖에 없었고 그다지 반가운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는데 이게 또 고참들에게 직싸하게 얻어터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줄이야...

 

그도 그런것이 당시 그녀는 내 애인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나를 좋아해서 면회왔을 아무런 연유가 없었기 떄문이다.

부대 안 다른 고참병 눈에라도 뛸까봐 노심초사 하는데 다짜고짜 내 팔짱을 끼려는 그녀를 애써뿌리치며

니가 여기엘 어쩐 일로 왔냐고 물었더니 너는 어쨰 여자친구가 천리길을 마다않고 달려왔는데 반갑게 맞이할줄도 모르냐고 핀잔이었다.

 

휴게실에 그녀를 잠시 기다리게 하고 당직에게 보고하러 가는데 부대 내 모든 카투사 선입들은 난리가 났다.

치마 두른 여자만 봐도 환호를 할만한 피 끓는 청춘들이 키 168~9 정도 되는 갓 스물의 꽤 미인 축에 들 아가씨가 미니스커트를 입은 채 나타났으니

그것도 맨 후임 쫄따구에다 평소 애인은 고무신 가꾸로 신고 떠났다고 했고 툭하면 탈영할 듯 위태위태해 뵈던 놈을 찾아온 여자였으니...

 

옛날 애인이냐 새로 생겼냐 여동생 또는 언니는 있냐 등등의 온갖 질문에 소개 부탁이며를 퍼붓더니 오늘 외박 나가라고 떠보는 것이었다.

 

가만...외박? 외박이라...

내 애인도 아니고 부모도 아닌데 외박이 가능한가?

군기가 바짝 들었던 쫄병이었으니 가족도 아니고 진짜 애인이 아니면 외박 같은 건 불가능할 거라고 믿었다.

곰곰 생각하다가 다시 또 내 속의 대담함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며 재빠르게 주판알을 튕기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었던 한마디  "니 오늘 내랑 같이자자"

그녀 왈 "와?"

"고마 부대 밖에서 하루 자고 싶어서 그란다."

"그래? 알았다 그라자..."

 

평소에도 쾌할한 성격인 그녀는 남자들의 세계와 또래 군인들의 마음도 어느정도 헤아릴 줄 알았기에 그런 대답을 바로 했을 것이다.

결론은 외박을 신청하기로 하고 바로 위 선임부터 말년고참까지 외박신고를 하게 되는데 당시 우리 부대의 관례상

모든 선입들에게 신고를 해야 비로소 허락이 되는데 이게 시간이 한 시간도 걸릴 수 있고 두 시간이 더 걸리기도 하는데

 

역시 누구냐 부터 애인 있으면서 거짓말 했다고 정강이 걷어차이고 몇 번 할 거냐 소개 해줘야 보내준다 등등 신고가 다 끝난 시간이

밤 열한시가 훌쩍 넘어서 부대를 나서게 되었는데 주지하다시피 군인의 통행금지 시간은 밤 열시까지이다.

 

그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오늘 하루는 선임병들의 시달림에서 벗어나 완전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다는 행복감에 빠져

헤실헤실 웃으며 그녀와 문산읍 여관으로 향하는데 저만치 앞에서 카투사와 미군이 한조를 이룬 헌병이 다가오는 것이다.

평소 한국군 헌병이 보이면 헬멧을 벗겨 멀리 던져버리고 도망가야 된다는 우스개 소리는 있었지만 카투사 헌병이라면 별로 피할 일이 없었는지라

무심히 지나쳐 가려는데 몇걸음 지나쳐갔을까 "어이 이등병!" 하면서 부르는 게 아닌가?

 

뒤돌아 서면서 봤더니 손짓을 하며 나를 오라고 하는 것이다.

잠시 그녕에게 골목 입구에서 보였던 여관을 가르키며 먼저 올라가 있으라고 하고는 헌병에게 다가갔더니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것이냐고 묻는다.

 

멍청한 놈이 똑똑한 척 한다고 그냥 애인이랑 외박가는 중이라고 사실대로 말하면 될 것을

그먄 빙 둘러 면회온 애인 기차역에 바래주기 위해 가는 중이라고 했더니 잠시 헌병대로 따라가자고 한다.

낭패한 기색으로 그녀를 봤더니 슬쩍 썩은 미소를 지은 채 잘 댕겨오라고 손짓을 하면서 여관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헌병대 사무실까지 잡힌 듯 끌려간 듯 해서 조사 아닌 조사를 받게 되는데

나중에 아려준 사실인즉 그 카투사 헌병은 제대말년이었고 나의 부대 최고참과 동기였는데

쭉쭉빵빵한 미니스커트를 입은 애인과 외박을 가는 나를 놀리려고 장난을 쳤던 것이었다.

 

조사를 하면서 외박을 가는 거면서 왜 근무자에게 거짓말을 했냐는 것인데

아무 말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푸시업 50개를 시키는 것이다.

 

49개 까지 구령을 하고 마지막 50은 구령을 하지 않는데 군기가 잘 들어잇었던 때였기에 무난히 시키는대로 했더니

짜식 군기는 잘 들었네 라면서 여ㅠ옆 미군 동려에게 답배를 한대 청하는 것이다.

 

이때를 놓칠세라 잘 보이기 위해 얼른 담배한대를 꺼내 권했더니

"어쭈? 이 자식 봐라, 너 왜 양담배를 소지하고 다녀?" 라면서 다시 푸시업 100개를 시키는 것이다.

 

카투사도 미군들과 똑 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영내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양담배도 피울 수가 있었지만

당시의 국내사정상 통행금지도 있었고 외국산 담배는 아무도 소지도 피울 수도 없었던 시잘이었다.

 

다시 아무런 항변도 못하고 시키는대로 99개를 한 후 마지막 100개 째엔 구령을 하지 않았더니

다음부턴 근무자가 묻는 말에 거짓말 하지 말고 똑 바로 답하라면서 썼던 진술서를  주면서애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 가겠다고 버티면서 부대로 돌아가서 헌병대에 잡혀갔었다고 신고를 해야 한다고 우겼다.

 

니 선임병장이 내 동기니까 안 가도 된다면서 등을 떠미는 것이었다.

정말이냐고 약속같은 다짐을 받고서 그녀가 있는 여관으로 향하는데 마음속은 통 대로 가야하는데 라는 갈등만 오락가락...

 

주로 결론을 내릴 땐 서슴없이 간 큰(?) 결론을 곧잘 내리는 성격으로 터벅터벅 여관으로 향해버렸다.

푸시업 한다고 주먹 쥐었던 내 손등의 핏자국을 보더니 "니 기합 받고 왔네? 수고했다.."라고 놀리던 그녀...

 

그렇게 자리를 깔고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는데

한참의 시간이 어느만큼 흘렀을까?

그녀가 내게 이런다.

 

" 야! 니는 이렇게 쓸만한 여자가 속옷 바람으로 바로 곁에 누워있는데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가?"

 

" ???"

 

그떄 내 머리 속엔 온통 부대로 돌아가서 신고를 해아하나 될대로 되버리라고 해야 하나로 갈등의 연속중이었다.

 

"니 내 몸에 대해서 암 생각 음나?"

 

"고마 자라~"

 

우역곡절 끝에도 난 그녀의 옷깃도 스치지 않은 채  그밤을 송두리째 날로 세웠는데

다행 그밤 헌병대 사건은 그 현병고참의 장난이 맞았던 것인지 부대 네에도 아무일 없이 넘어갔다.

 

그 후 계속되는 고참들의 강제적인 강요 등쌀에 못이겨 여대생 수 십명을 이끌고 미군들을 포함한 단체 미팅을 부탁하게 되는데

오히려 친그들을 잔뜩 끌고 나타난 그녀는 미팅을 하던날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춤을 추는데

그도 그럴것이 당시의 고급 오디오 세트 장치에다가 부대내 클럽이며 영화관등은 최고급 시설이었었고

 

야외 바베큐로 스테이크며 햄버거 같은 식사 대접을 레이디 우선이라며 사족을 못 쓰는 미군들과 함께했으니 뭐...

팔등신 같이 쭉쭉 빠진 여대생들이 커다란 엉덩이를 눈 앞에서 미군들과 흔들어대니 화도 나고 입가에 침도 흐르는 것 같고 지랄 같았다...

 

당시의 부대 내 폭력이나 후입병 괴롭히기 수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는데

미군 부대는 평소 개인 총기소지를 하지 못하기에 망정이었지 소지만 된다면

그야말로 총으로 죄다  갈겨버리고 탈영하고 싶은 마음이 하루애도 수 십 번은 족히 가지게 될 정도였었다.

 

그 때마다 내 바로 위 선임병은 무슨 사고라도 칠까봐 내 눈치를 세심히 관찰하고 다녔을 정도였다.

심지어 근무가 끝난 후 밤이면 막사에서 걸어 이십 분 정도 걸릴 거리에 있는 영내 밖 가게에 가서 소주를 사오라고 시키는데

반드시 한병만 사 와야 한다는 것이다.

 

고참들끼리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한 병을 다 마시는 동안 쫄병은 침상 끝에 차렷 자세로 앉아 있다가

다시 한 병을 사오라고 하면 부리나케 달려가서 다시 한 병을 사오는 것이다.

 

나중에 가게 주인이 귀뜸을 해주길래 외상으로 소주 한 박스를 사서 내방 케비넷에다 두고 고참이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한 병을 들고

화장실 뒤에서 담배 한대를 피운 후 제자리 뛰기로 숨결을 헉헉거리게 하여 술을 들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고참이 어느날에 담배는 맛있게 피웠냐 그러면서 지들끼리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었다.

 

집합이라는 것에 걸려 몽둥이로 맞고 잇으면 퍽퍽 소리를 들은 미군들이 카투사 싸움한다고 신고를 해 주는데

헌병들이 달려와봐야 교육 중이었다고만 하면 아무 탈 없이 넘어가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에도 고참에게 경례를 하는 우릴 본 미군들은 얻어터지고도 경례를 하는 바보라고 놀림을 받기 일쑤였으니...

 

군대 내 폭력을 증오하던 나로서는 3년의 기간동안단 한 번 예의 없고 군기조차 아예 없었던 새카만 후임병 따귀 한 대 때린 게 전부였다.

 

술 못 마신다고 그렇게 폭력을 하던 고참들을 혼내 준 일이 있었는데

하루는억지로 권하던 술잔을 두고 고량주를(당시 고량주가 부대 내 유행) 들고 병 째 나발을 불어버렸던 것인데

그러자 고참들은 이 새끼가 생긴 것처럼(술 잘 마시게 생겼음)술고래면서 여태까지 속여왔다면서

발로 차고 밟고 무차별 폭력을 가하는 동안 나는 속으로 그래 마음껏 패라면서 우는 듯 웃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인가 두 시간쯤인가 흘렀을테고 나는 앉은 모습 그 상태로 바닥으로 스르륵 쓰러져 버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급히 앰블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가 부대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만 24시간이 흐른 후 깨어났었던 셈인데 고참들은 줄줄이 군법에 회부될 지경에 이르렀는데

 

몇몇 고참들의 설득에 못이겨 탄원서를 제출하여 그들을 구제해 줬는데 한 달도 못 되어 그 개버릇들 어디가랴...

한동안 무차별적인 보복을 당하며 군생활을 버텼었지 뭐...

 

그러다 상급부대에서 그간의 사건을 미군에게서 접하고 미군들의 권유로 일주일 휴가를 받게 되는데

학창시절 공부는 못했지만 다행 암기 능력은 좀 있었기에 평택에서부터 영어 시험이며 미군들과의 대화를 잘 할려고 교재는 무조건 달달 외워버렸고

미군들의 입을 쳐다보며 그들이 말 하는 그대로 따라 했더니 미국 땅 전체에서 지원해 오던 미군들의 사투리까지 그대로 따라 발음하게 되었었다.

 

이게 미군들과 친하게 지내게 되는 계기가 되면서 자연스레 아주 절친한  친구가 된 사람들도 많이 있게 되고

휴가 때 미군들을 데리고 고향에서 함께 보내기도 하면서 그들에게 한국의 오랜 관습이며

통행금지 모습 등 서민들의 생활 모든 것들에 대한 체험까지 하게 해주면서 친분을 쌓은 덕분이었다.

 

 

 

그랬는데 꿈 같은 일주일의 휴가를 보내고 마지막날 친구들과 당구를 치다가

귀대 하루 전 출발을 해야 서울을 거쳐 부대로 갈 수 있는 것을 아예 밤 새 당구를 쳤던 것이다.

 

원래 귀대 시간은 다음날 오전 10시 까지가 규정대로인데

카투사들에게 위수지역이라는 게 있고 또 아직은 쫄병이라 미리 귀가를 시키던 관례가 있었다.

전날 밤 부대에서는 사고뭉치 쫄병 휴가를 보냈다가 밤이 지나도록 아예 귀대를 하지 않았으니 발칵 뒤집어진 것이다.

 

다음날 날이 밝고 당구장을 나온 후 그제서야 걱정이 되기 시작하던 난

당시엔 휴대전화도 없었고 직방으로 연락을 하려면 전보 밖에 없었던 시절이라 친구들에게 집안에 이러저러한 일이 생겨

조금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라고 전보를 한 통 치라고 하고 부대로 출발했는데...

 

귀대를 하고 그야말로 죽지 않을만큼 얻어터지고 있었는데부대장의 급한 호출을 받고 갔더니

급히 집으로 다시 가보라고 3일짜리 휴가를 주는데...

알고봤더니 친구놈이 전보를 지맘대로 쳐가지고 부모님에게 큰 일이라도 발생한 것처럼 보내버렸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미군부대 내에서는 미군 부대장의 권한이 막강하여

사람 좋고 한국인들에게 친밀감이 많은 장교일수록 카투사 쫄병들에게는 군생활에 다소 숨통을 트게도 했던 것이다.

 

다시 3일간의 휴가로 고향엘 갔더니 친구녀석들은 반쯤 죽을줄 알았던 놈이 멀쩡하게 다시 나타났으니

그녀석들은 암것도 모른 채 카투사 군생활을 부뤄워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문제는 3일 째 휴가가 끝나던 마지막 날 나로서도 도지히 원인을 알 수 가 없는 일이 발생했는데

왼쪽 볼이 퉁퉁 붓기 시작을 하는 것이었다.

이빨이 아픈 것도 아니고 얻어 맞은 것도 아니라 도무지 원인을 알 수가 없는 노릇이라 했는데

귀대신고를 마친 후 곧바로 앰블런스에 실려 용산에 있었던 미군 종합병원으로 실려갔다.

 

대령쯤 되었던 비군 군의관이 진찰을 하더니 그냥 긴 바늘로 입안쪽을 푹 찔러버리는 것이었다.

별로 아프거나 한 건 아니었고 잠시 입안에 찝찔한 소금물 같은게 고였는데 별 이상은 없고

군생활이 힘들어서 입 안이 부은 것 같다고 며칠 입원하여 가료를 하라는 것이다.

 

당시 미군 종합병원은 환자에게는 그야말로 천국과 같은 호화생활이었는데

병원 복도 여러곳의 벽장 냉장고엔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이며 당구장 시설까지 갖춰져 있었기에

쫄병으로 지내던 부대생활에 비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 이상이었던 셈이다.

 

약 일주일 정도 입원하고 치료가 끝나던 날 군의관이 부대로 돌아가든지 휴가를 가든지 선택을 할 수가 있다고 알려준다.

미군법상 부상이나 치료를 위해 일주일 이상 입원을 한 군인은 누구나 일주일간의 휴가를 받을 수가 있다고 되어 있었던 것이다.

 

부대로 돌아가 휴가 신고를 하는 나를 대하던 고참들에게 이래 저래 나는 못잡아 먹어 안달이 나던 쫄병이었던 셈이다.

휴가 마치고 돌아 오거든 두고보겠다 였을테지...

 

이쯤에서 나에게는 또 다시 놀라운 반전이 이뤄지는데

동두천에 있었던 미2사단 본부  미군군악대에서 통역을 할 수 있는 카투사 군악병이 필요하니 예하부대에서는 음악에 소질이 있거나

연주 경력이 있는 사병을 차출해서 보내라는 전통이 날아들었던 것이다.

 

어릴적 부터 줄곧 트럼펫을 전공했었던 내 경력을 부대에서 알고서 2사단으로 차출을 보내게 되는데

나에게는 그야말로 고참들을 향해 으하하하~ 이 개끼들아! 잘 쳐묵고 잘 뒈져랏! 하고 외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길로 난 더플백 하나 들쳐매고 2사단으로 향했고 미 군악대 장교 앞에서 미국의 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 를

악보 하나 틀리지도 않은 채 외워서 연주했더니 바로 합격을 하고 그때부터 동두천에서 군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숙소 시설이며 환경은 이전 부대에선 상상도 못할만큼 나았었고 아무도 나를 괴롭힐 수 없는 미군 군악대 내

단 3명만 있었던 카투사의 최고참이었으니 더 말할 나위 있었으랴...

이후 제대할 때 까지 난 아무런 사건 사고(?) 일으키지 않고 무사히 제대를 할 수 있었다.

 

그때 그 시간 나는 왜 완전 무방비의(?) 속옷 차림으로 내 곁에 누워있었던 그녀를 탐할 생각을 하지 않았었을까?

아무리 내가 오랫동안 굶었다손(^^) 사랑하지 않거나 않을 여자와는 섹스라는 것을 할 생각도 않거니와  잘 되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와 그녀는 사귀거나 사랑하던 사이도 애인도 아니라서 그랬다기엔 피가 끓던 그 새파란 나이의 젊음에게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고

지금 돌이켜봐도 그 당시 헌병이 무서워서 곁에 누워있던 그녀를 여자로 볼 정신이 없었다고 하기에도 애매한데...

지금의 나라면 아마도 결코 그냥 지나가지 않았을 것 같은데...

오히려 그런 그녀가 싫다고 해도 혹시 나는 억지를 부리지 않을까 ...

 

그녀는 당시 의정부의 어느 한국군 부대에서 근무한다던 남친을 면회하러 가던 중간에 나에게로 먼저 들린 거였다고 하더라만

삼 세 번 더 찾아온 나는 그때마다 현병대 유치장에 있었던 것이다...

 

결혼하여 아이들 낳아 잘 살고 있다던 그녀 그녀와의 우정이 여전히 지속 되고 있는 것은

아주 오래 전  젊은 청년 때의 일로 평생 후회할 일 만들지 않아서 무척 다행인데

그래도 그렇지 그런 천재일우의 황금 같은 기회를 그냥이었던 것이 오늘 곰곰거려(^^) 보니

조금은 후회되는 걸 보면 나도 최소한의 살아있는 늑대축에는 끼일 수 있을테지 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