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누가 새벽 강을 걸어간다 본문
깊은 밤이었다.
새벽이면 늘 커피를 마시는 버릇이 도졌다.
중독 같지도 않은 내 우울증은
마치도 아주 길게 생리통을 앓는 여자들의 그것처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가...
밤바람이 유난히 쉬원하게 불고 지나간다.
이 한밤에 맨발로 베란다에 나가 서 있으니 강 어귀 전체가 안개에 둥둥 떠 다니는 듯 하다.
사람들은 잠들어 있다,
발소리를 죽여 밖으로 나간다.
낮으막한 돌담 한켠에 감나무 가지가 모가지를 늘어뜨린 채 서 있다...
무성한 콩밭을 지나 강가로 나간다.
갈대와 마른 옥수수 대궁들 사이 강 건너편 산 위로 보름달이 환하게 떠올랐다...
가을 찬 바람에 푸른 물안개가 떠오르고 갈대가 우거진 길로 누군가 걸어간다.
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잡으려고 했지만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돌아와 식어버린 커피를 다시 천천히 마신다.
지붕을 쓸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듣는다.
어서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밤은 깊은데 전원을 꺼 놓은 전화기로는 어디 전화 한 통 걸어볼만한 곳이 없다.
신(神)조차 없는 나는 이러다 밤을 섬기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의지할 것들을 하나 둘씩 잃어가면서...
강 건너편 검은 산봉우리는 그 어떤 신의 글자나 조각보다 무섭고 단단하고 깊어 보인다.
비바람도 눈보라 치는 찬 겨울밤의 배고픔도 그를 쓰러뜨리거나 고뇌하지 못하게 할 부동의 저 육중함
이런 것들 앞에서 나는 때로 침묵하게 된다...
밤 깊은 갈대밭을 홀로가던 사람
검은 벽처럼 거대한 절벽 얼굴이 나무껍질처럼 거친 무명의 사람
너무 많은 변명을 하며 오감으로부터 얻어지는 진실을 수다스럽게 지워내며 살아가는 사람
말, 곧 언어는 그저 기호일 뿐일진데 표현 방법이나 체계가 다를 뿐 아니더냐,
나는 이제 조금씩 예전처럼 침묵하는 법을 다시 배우기 시작한다.
무엇떄문에...
떄때로 가슴 벅차오를 떄
고요히 몸도 마음도 다 열어 자유처럼 자신을 버려두기도 하는 방법을 좀 더 배워야겠다.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처음 옷을 벗는 여자처럼 온갖 비의를 전적으로 끌어안고 목메어 살아갈 일이 아닌가...
며칠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있다.
비가 내리면 아무도 몰래 슬그머니 여행이나 떠났으면 좋을텐데
맨발에 구겨진 신발이어도 어딘가 당장 도착할 목적지가 없어도 좋은데...
가다 보면 저넉쯤엔 필시 어딘가에 가 닿을테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바다든 산이든 어떤 낯선 시골이든
제각기 한 가지 색으로 제 무게를 뽐 내고 서 있을테고
모든 풍경들이 문틈으로 내다보는 세상처럼 아득한 거리를 두고 나를 손짓할텐데...
혼자여도 그만 아니런가,
유리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처럼 나 또한 그대로 서서히 가라앉아버리면 그만일것을...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을 보랏빛이라고 했던가...
보랏빛으로 시작되는 여명은 시시각각 미묘한 차이를 나타내며 감청으로 변하다가
그러다 다시 보랏빛이 뒷켠으로 사라지며 마침내 바다속같이 텅 빈 푸른색으로 변하겠지...
하지만 그것들 또한 세상에 머무는 순간이 거의 찰나에 불과할테지,
혹시 커피라도 다시 끓여오면 어느새 날이 환하게 밝아질까봐 조바심이 나는 것을...
가끔 책상에 앉아 밤을 새울 때가 있다.
새벽의 그 다채로운 순결의 빛을 목도하기 위함은 아닐지라도...
마른 비늘 다 떨군 채 묵묵히 선 가문비 나무 아래에서 찬 겨울 눈 내리는 날이 오면 드디어 죽고 싶다.
은빛으로 반짝이는데 앙상한 자작나무 숲 아래면 또 어떠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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