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愛憎 그리고 惻隱之心(치부?) 본문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뭐 그런 이유로 지난 기억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건 이미 지나간 과거만 가능하다고 어느 글 쓰는 사람이 말하면서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는 유추하지도 예단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하던데
덧붙인 그의 글은 오지 않은 내일을 기우로만 맞이하지 말라는 이야기였을 터,
잘 살아줬으면 잘 살고 있을테지 참 잘 됐으면 좋겠다 뭐 그런 기도조차 되지못할 바램따위로
지난 시간 속에 만났던 인연에게 더 잘 대해주지 못했던 미안함을 씻어본다.
내 기억 속의 지난 사람 중 측은지심과 애증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둘 있는데
아마도 다른 이들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사랑하다 헤어진 이유라는 게
대개들 미움으로 남았거나 안타까움 둘 중 하나 아니런가 시퍼서이다.
지난 내 이야기를 흘려 듣기라도 했었던 지인들 몇은 그런데 왜 헤어졌느냐고 반문들을 했지만
사람과 사람의 사이라는 게 어디 죽도록 미워져야만 헤어지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게 애증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만
꽤나 사랑할(?) 때 헤어졌으니 그런 말을 할만도 하다만 어물쩍 얼버무릴 변명이라도 할라치면
그나마 좋았던 기억 조금이나마 가져가고 싶어서였었고
내가 밀어내지 않으면 그의 행복을 입으로만 허풍치기에는 내 나이와의 차이가 너무도 많았었기 때문이었다.
1980년 말이 1990년으로 넘어가던 무렵 한부모가 되었던 사람들은
소외 되고 씁쓸한 스스로들의 감정을 빗댄 표현으로 헤어진 전 배우자를 전임자라는 호칭으로 만들어 쓰기도 했었는데
그 여자는 갓 어른이 되고 1987년 20살이 되던 해 내게로 왔었다.
내게로 왔었다고 한 것은 십여 년 학교생활을 시골 조그만 도시에서 하고 있을 때 만난 여자와
30살이 되던 해 모두의 반대를 신나하면서(?) 결혼한 후 의부증에 질려 일 년 만에 이혼을 하고
세상이 싫다면서 호수 골짜기에 들어박혀 오랜 시간 낚싯대만 쳐다보다 부산으로 가게 되었었다.
하루 하루 현금이 수천만 원씩 오가는 회사여서
믿을만한 잘 아는 사람의 금전 출납 관리가 필요하다는 먼 친척의 부탁을 받고 간 곳은
경리부서 같은 직책도 아니고 일반적인 회사도 아닌 그야말로 뉴스에서만 접하던 불법 성인 오락실이라는 곳이었다.
당시의 서면 부산상고 옆 복개천 일대는 성인 오락실이 활개를 치던 때였는데
그야말로 무법천지였었고 부산 출신으로 세계 복싱 챔피언이었던 유명 복서조차
매일 밤 마약에 취해 오락실에서 부정을 저지르다 얻어맞기도 하던 무시무시한(?)곳이었는데
나는 주먹사장의 처남뻘이라서 아무도 건들지 않았기에 겁모르고 설쳤었던 것 같다.
예전 같았으면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돌아섰을 것을 당시의 나로서는 스스로도 이해못할 허망함에 빠져 있을 때라
뭔가 비밀스럽고 밝은 세상의 이면에 있던 더러운(?)경험에 대한 호기심에 덜컥 수락하고 말았고
내가 하던 일이라는 게 주로 감시역할이었는데 종업원들의 삥땅이나 도박자들과 직원간의 비밀거래등이었다.
성격상 공과 사도 제대로 구분 못하는 사람이었고 종업원이래야 다들 나랑 비슷한 인생 불쌍한(?)
아이들이라 내가 딱히 감시를 하고 말고할 것도 아니어서 매양 대충 눈 감아주고 덮어주고 넘어갔었고
도박중독자들이 가져온 돈 다 잃고 갈 때 교통비 몇푼 잘 설득해서 쥐어 보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일 년간을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겨우 버텨낸 날건달(?)같은 생활을 하면서
견딜 수 있을만큼만 버텨보자고 그럭저럭 적응할 무렵 새로운 종업원으로 여자애가 들어왔었는데
저나 나나 도무지 이런(?)곳에 견딜만한 인물이 아닐 성 싶은 해맑은 소녀였었다.
어느날엔가 종업원 가운데 나랑 나이가 비슷한 아가씨가 일얘기로 의논 할 게 있다면서 다방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 자리에 얼마 전 새로 들어온 어린 아가씨가 함께 온 것이었다.
일얘기로 의논할 게 있다던 것은 거짓말이었고 그 소녀를 대신해서 이야기를 한다던 내용인즉
처음 왔을 때 부터 부장님을(당시의 내 직책) 좋아하게 되었다며 용기가 없어 직접할 수 없어 부탁하게 된 게 자초지종이었다.
이야기를 듣고난 후 박장대소까진 아니었지만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는데
당시의 내 나이가 31살이었고 그 소녀의 나이가 20살이었다.
11살의 나이 차이가 무슨 대수냘 수도 있겠지만 11년이라는 차이보다 보여지는 모습에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가 이혼을 한 홀애비의 곁에 선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아서였기에
가서 사랑좀 해보고 결혼도 한 번 해보고 오면 받아주겠다고 했었다.
이마에 새똥도 벗겨지지 않은 녀석이 까분다면서 비웃고 말았었는데
그 후로 그 아이는 사뭇 심각하고도 결사적인 대쉬로 나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는데
마치 죽음이라도 불사할 듯 막무가내였었다.
얼마가지 못해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거라 여겼었는데 언제나 한결같이 적극적이라
열여자 마다할 사내 없다고 하는 옛이야기를 따르듯
그런 식이 수개월이 지나면서 못이기는 척 조금씩 마음을 열어 따뜻하게 챙겨주면서 정이 든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직장생활에 도무지 적응도 되질 않고 마치 범죄와의 전쟁 한 가운데
내가 꽤 중요한 조연으로 서 있어야 하는 것 같아서 더 싫기도 하여 고향으로 되돌아 가기로 했는데
문제는 그 아이가 한사코 따라 나서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온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평생 지아비로 섬기겠다는 각오라는 대답을 했었다.
떠나오기 얼마 전 몰래 직장을 그만 두고 도망치듯 하다가 찾겨져서 죽겠다고 난리치기도 하고
울며불며 애원하던 아이가 싫지는 않아 결국엔 함께 고향으로 갔었다...
변변한 직장을 다시 잡지도 못했고 부모집에 얹혀 살았었는데
그 아이는 세상 물정이며 아무런 음식이며 가사일을 할 줄도 몰랐지만
당혹스럽기도 했고 측은하게 느끼기도 했었던 어른들이 감싸주면서 빠르게 가족처럼 딸처럼 적응을 해나갔었다.
부모와 형제에게 그렇게 살갑게 잘할 수가 없었던 것이 헤어진 후에도 오랫동안 고마움으로 남기도 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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