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영산홍 본문
영산홍은 철쭉 종류로 일찍이 조선조 세종 때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하는데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보면 꽃이 진달래보다는 늦게 피고 철쭉보다는 일찍 핀다고 했으며 지금은 세계적으로 수백 품종이 개발되어 많이 심겨지는 아주 화려한 꽃나무다.
같은 과에 속하는 진달래는 단일품종이지만 영산홍이 속해 있는 철쭉류는 품종들이 무척 다양하다.
나무줄기가 1m 내외 되는 영산홍은 5월 초쯤에 대개 지름 3~5cm 되는 홍자색의 정열적인 꽃이 피는데 다섯으로 갈라진 꽃잎의 아랫부분이 붙어 있는 통꽃으로 꽃받침은 달걀 모양을 한다. 꽃잎 안쪽 수술이 있는 곳이 좀 더 진한 붉은색인데 이것은 벌들이 꿀샘 있는 곳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암시해 주는 것이다. 정열적인 모습으로 꽃이 피어 있는 기간이 겨우 5~7일밖에 안 되지만 아름답기가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이며 향기가 전혀 없는 것이 철쭉류 꽃들의 특징이다.
줄기는 높이 15~90cm이며 가지는 잘 갈라져 잔 가지가 많고 갈색 털이 있다. 잎은 어긋나지만 가지 끝에서는 모여 달리고 좁은 바소꼴으로 길이 1~3cm, 너비 5~10mm이다. 잎이 약간 두껍고 광택이 있으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며 뒷면 맥상과 표면에는 갈색 털이 있다.
꽃은 4~5월에 가지 끝에 홍자색으로 피고 지름 3.5~5cm이며 꽃의 밑부분에는 일찍 떨어지는 넓은 비늘조각이 있다. 꽃받침은 둥근 달걀 모양으로 짧은 갈래조각이 5개로 갈라진다. 화관은 넓은 깔때기 모양으로 털이 없으며 5개로 갈라지는데 안면의 윗쪽에 짙은 홍자색 반점이 있다.
수술은 5개이고 수술대의 밑쪽 반부분에 알맹이 모양의 돌기가 나 있으며 꽃밥은 자주색을 띤다. 암술은 1개로 길이 3~5cm이고 암술대에 털이 없다. 열매는 삭과(蒴果)이고 9~10월에 익으며 달걀 모양으로 길이 7~8mm이고 거친 털이 있다.
진달래목 진달래과의 반상록관목으로 겨울에도 잎이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는다. 많은 원예 품종이 있고 꽃색은 붉은색·흰색·분홍색 등 다양하며 일본 원산으로 한국에서는 온실 및 남부지방에서 많이 심는다. 종자와 삽목에 의해 번식시키는데 발근이 잘 된다. 한방과 민간에서 잎은 발진·강장·이뇨·건위·구토 등의 약재로 쓰인다.
조선조 역대 왕 중에 인조는 영산홍을 너무 좋아해서 정사를 돌보는데 소홀할까 봐 중신들이 궁 안에 있는 이 꽃나무를 베어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영산홍은 옛날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아 왔으며, 지금은 붉은색, 흰색, 분홍색 등 아주 다양한 원예 품종이 육성되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영산홍이 기록에 처음 나타난 것은 강희안이 쓴 《양화소록》이다. 세종대왕 재위 23(1441)년 봄에 일본에서 철쭉 화분 몇 개를 바쳤다. 임금이 뜰에서 기르도록 명하여 심었는데 꽃이 피었을 때 꽃잎은 홑잎으로 매우 컸다. 색깔은 석류와 비슷하고 꽃받침은 겹겹이었는데 오랫동안 시들지 않았다. 임금께서 즐겁게 감상하시고 상림원(上林園)에 하사하시어 나누어 심도록 명하셨다고 한다.
영산홍을 지나치게 좋아한 임금이 연산군이었다. 연산군 11년(1505) 1월 26일에 “영산홍 1만그루를 후원(後苑)에 심으라” 명했다.
같은 해 4월 9일에 왕이 전교하기를“장원서(掌苑署) 및 팔도에 명하여 왜척촉(철쭉)을 많이 찾아내어 흙을 붙인 채 바치되 상하지 않도록 하여라” 하였다. 이로부터 치자 ․ 유자 ․ 석류 ․ 동백 ․ 장미 등 여러 화초들을 모두 흙으로 붙여서 바치게 하였다. 감사(監司)들이 견책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종류마다 혹은 수십 주(株)를 바치되 계속 날라 옮기니 백성이 지쳐서 길에서 죽는 자가 있기까지 하였다.
다음 해인 연산군 12년 2월 2일에는 ”영산홍을 재배한 숫자를 해당 관리에게 시켜서 알리게 하라“고 했다. 연산군은 같은 해인 3월 7일에 장의문(藏義門)이라는 정자를 지었고 주위의 산 안팎에 두견화(영산홍)를 심고 그 정자이름을 탕춘정(蕩春亭)이라 하였다.
연산군은 폐비윤씨의 아픔으로 외롭고 고독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리 얼굴이 탁월히 아름답지도 않던 녹수는 대감댁 종의 아녀자로 아이까지 출산한 후에 연산의 희빈이 되었다 한다. 누가 연산과 녹수을 희대의 악녀와 연산을 군으로 강등했단 말인가? 연산홍은 대신 말한다 그 피빛 붉음으로 그 진하디 진한 아픔을 대신 전한다. 연산 피를 토하고 죽던 그자리에 하필이면 아름다운 하얀 꽃 만발한 꽃이였던가? 그 날 그 하얀 꽃이 피물이 들어 그 고통의 피물이 뿌리 깊숙이 스며들어 그 다음 해도 그 다음 해도 연산의 피빛으로 피어 난다 한다. 그리하여 그 꽃 이름은 연산홍이라 부른다 한다.
사학자들은 말한다. 결코 희빈 장녹수가 악녀가 아님을 그녀 또한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였다는 것을 그녀 녹수는 연산보다 2살이나 연상으로 때로는 남자의 깊은 고통을 함께 나누며 엄마가 되어 품안에 연산을 안아 주었다 한다. 엄격하기 그지없는 구중궁궐 법도에 규범에 숨조차 쉬기 힘든 연산에게 이넘 저넘하고 호령하던 그녀 녹수였다 한다.
정녕 녹수는 연산의 자유를 찾아 주고 싶어 했던 남정네의 깊은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통찰을 가졌다 한다. 연산에게는 정비 신왕비가 있지만 결코 여자로서의 사랑은 희빈 녹수 뿐이였다 한다. 연산홍 그 붉디 붉은 아픔을 혹자는 연산의 피라고 말하고 혹자은 희빈이 연산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라 한다.
강릉지방에서는 5월 단오(端午)에 단오굿을 지내기 전인 음력 4월 보름날에 대관령의 서낭당에서 굿을 하면서 마을사람들의 재앙을 덜어주기 위한 푸닥거리를 한다. 그런 뒤에 횃불을 들고 긴 행렬이 산을 내려오면서 「산유화가(山有花歌)」(메나리소리)를 부르는데, 이 노래를 「영산홍」이라고 한다. 즉, 대관령의 국사서낭당에서 산신(山神)을 모셔와서 강릉의 홍제동에 있는 여자 서낭신에게 18일 동안 모셨다가 다시 영신제(迎神祭)를 올리고서 현장에 내모셔놓고서 단오굿을 베푼다.
또한 대관령 국사성황신 행차가 구정면 학산리에 이르면 이곳 주민들은 횃대에 불을 붙여 영산홍꽃을 바치며 신을 맞는 의식을 거행한다.
불교의 산화공덕과 같은 의미이며, 동시에 신라 때 강릉 태수로 오던 순정공의 부인 수로(水路)를 맞이하며 한 노인이 불렀다는 향가 「헌화가(獻花歌)」, 곧 ‘꽃 바치는 노래’와도 그 의미가 통한다. 횃대의 불꽃과 상상 속의 꽃이 신격을 영접하는 민요로 불려졌다.
영산홍은 일본철쭉화, 두견화(杜鵑花), 홍색두견화(紅色杜鵑花), 왜철쭉, 오월철쭉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봄부터 한여름까지 가로수나 공원의 정원수로 현란한 진홍빛을 뿜는 키 작은 꽃나무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유교적인 윤리성과 관련하여 꽃의 품격(品格)과 운치(韻致)에 대해 논하고 꽃마다 품계와 등수를 매겼다. 강희안은 『화목구품(花木九品)』이라는 화품론에서 1품부터 9품까지 꽃의 품계를 나누었다. 그는 1품을 솔, 대, 연, 국화, 매화로, 2품을 모란으로, 3품을 사계(四季), 월계(月桂), 왜철쭉, 영산홍 등이라 하였다. 영산홍이 꽃의 품격과 운치에서 제법 높은 평가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방에서는 영산홍 꽃을 강장 · 이뇨 · 건위제 등 약재로 쓰고, 번식은 삽목이 가장 좋으며, 종자를 봄에 이끼 위에서 발아시켜 묘목을 만들 수도 있다.
영산홍과 두견새가 얽힌 인간의 심성과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다.
일본의 막부시대 세 사람의 장군들 중에서 오다 노부나가라는 장군은 “울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두견새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지 않으면 울게 하리라 두견새를”, 그다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리라”라는 일화가 유명하다. 알다시피 가장 성공한 장군은 도쿠가와로서 참고 견디며 때를 기다리는 순리를 쫓아야 한다는 삶의 이치를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