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살구꽃 본문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옛 시골 마을에는 서너 집 건너 으레 몇 그루씩의 살구나무가 있었다. 그래서 봄이 되면 아담한 초가지붕 위에 뭉게구름이 일 듯 피어올라 장관을 이룬다. 살구꽃에 파묻힌 동네를 멀리서 바라보면 그 연분홍 색깔과 간간히 버드나무의 연푸른빛이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동양화를 이루고 있다. 고향을 멀리 떠난 사람은 고향의 이 정경을 잊을 수 없다. 조선 숙종 때의 문신 김진규는 거제도에 귀양 가서 그곳에 살구꽃이 피자 고향을 그리는 시를 지었다. 이호우의 작품도 살구꽃 핀 마을의 인정미를 따뜻한 정감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발전하여 목동이 나그네에게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는 ‘목동요지행화촌(牧童遙指杏花村)’의 그림은 평화로운 고향마을을 상징할 뿐 아니라 천하가 태평하여 살기 좋은 세상을 바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살구꽃은 관문(官門)에 등용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실제 옛사람들은 살구꽃을 급제화(及第花)라 부르기도 하였다. 옛날 과거의 전시(殿試)는 매년 음력 2월에 실시되는 것이 통례였는데 이때가 바로 살구꽃이 만발한 시절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화가가 그린 〈평생도(平生圖)〉의 한 부분인 삼일유가(三日遊街)의 장면을 보면 선비가 과거에 급제한 후 시관들과 함께 유가(遊街)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이 장면의 계절적 배경은 연붉은 살구꽃이 만발한 봄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제도와 풍습은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다.
중국 당대(唐代)에 과거에 합격한 신진사(新進士)들은 공식행사나 환영식전에 참석하게 된다. 이러한 행사 가운데서도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장안(長安)의 경승지 곡강(曲江)의 지반(池畔)이나 살구꽃의 명소 행원(杏園)에서 열렸던 일대 축하 파티였다고 한다. 오랫동안 고생한 것을 서로 위로하면서 술을 마시며 즐겁게 교유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기 위하여 당일은 천자까지도 일부러 출어하고, 장래의 유망주를 골라 사위를 삼겠다고 하는 대관들, 기타 신분 높은 장안 인사들로 성중의 태반은 비워 있었다고 사서(史書)는 전한다. 곡강의 연회가 끝나면 진사들은 거기에서 강을 따라 별로 멀지 않는 행원으로 자리를 옮겨 새로이 시를 읊고 풍악을 울리며 즐겼는데 원내에 심어진 수천 그루에 달하는 살구나무는 그날의 급제를 축하하는 것처럼 난만히 피어나서 꽃나무 밑의 사람들의 얼굴을 밝게 물들였다고 한다.
산에 복숭아꽃과 개울가 살구꽃이 울타리를 물들이니
길에는 봄이 깊고 두 언덕에는 꽃이 붉구나.
다행히 낭군의 힘으로 수달을 잡아
마룡을 모두 서울 밖으로 멀리 쫓았구나.
山桃溪杏映籬斜
一經春深兩岸花
賴得郎君閑捕獺
盡敎魔外遠京華
살구꽃은 복숭아꽃과 더불어 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이다. 음력 2 3월 경에 그 우아한 담홍색의 꽃을 피워 본격적으로 봄이 온 것을 알려줌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아 왔다. 우리나라에 건너온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때 이미 흔히 볼 수 있었던 꽃임은 혜통법사에 관한 찬시(讚詩)를 통해 알 수 있다.
살구는 씨를 발라 버리고 말린 것을 건행(乾杏)이라 하여 여기에 열탕을 부어서 행탕(杏湯)을 만들어 자양강장의 보약으로 즐겨 마셨다고 한다. 또 씨 속에 있는 인(仁)을 행인(杏仁)이라 하였는데 맛이 단 감행인(甘杏仁)은 볶아서 먹기도 하고 과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맛이 쓴 고행인(苦杏仁)은 행인유(杏仁油)·행인수(杏仁水)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옛날에는 개고기 먹고 체한 데, 육체(肉滯), 토사, 설사, 선홍열, 기침 등에 썼다고 한다.
그런지 중국에서는 의사의 미칭으로 행(杏)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다음 고사에서 유래한다.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선인적(仙人的)인 의사였던 동봉(董奉)이 환자를 치료해서 병이 치유되어도 약값을 받지 않고 중증인 자는 살구나무 다섯 그루를, 경증인 자는 한 그루를 심어달라고 했다 한다. 이렇게 해서 심은 살구나무는 수년이 지난 후에는 십수만 그루로 늘어나 울창한 숲이 되어 살구가 열기 시작하였는데 그 숲을 동선행림(董仙杏林)이라고 했다 한다. 그리고 살구를 같은 양의 곡식과 자유로이 교환하여 그 곡식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이 고사는 《신선전(神仙傳)》에 전해지고 있다.
살구나무는 우리 민족과 함께 오래 살아 온 탓으로 여러 가지 많은 격언도 있다.
• 빛 좋은 개살구 (겉만 좋고 실속이 없음을 뜻하는 말)
• 개살구 지레 터진다 (맛 없는 개살구가 참살구보다 먼저 익어 터진다는 뜻으로 되지 못한 사람이 잘난 사람보다 오히려 더 덤비고 날뛴다는 뜻, 또는 악이 선보다 더 가속도로 발전하게 된다는 뜻)
• 개살구가 옆으로 터진다 (못난 것일수록 못난 짓만 한다는 뜻, 또는 익숙하지 못한 솜씨에 어색하고 보기 흉하도록 멋만 부린다는 뜻)
• 개살구도 맛들일 탓 (맛없는 개살구도 맛을 들이면 그런대로 먹을 수 있다는 뜻으로 사람들은 취미나 취향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그 성질 나름대로 길들이면 어떤 사람이라도 적소에 쓸 수 있다는 뜻)
살구는 과일인 만큼 생식하는 외에 행정과(杏正果)·행병(杏餠)을 만들고, 행포(杏泡)라 하여 살구를 설탕물에 졸여 과자를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민속식은 사라진 것이 대부분이다
살구꽃은 낙엽 소교목으로 높이는 5~7m이다. 4월경에 꽃이 피며 열매는 6~7월경에 익는다. 꽃은 잎보다 먼저 피며 연한 붉은 색이다. 지난해의 가지에서 꽃이 피고 꽃자루가 거의 없으며 지름이 25∼35mm이다. 꽃받침조각은 5개이고 뒤로 젖혀지며, 꽃잎은 5개이고 둥근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