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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창고

봉선화

까미l노 2015. 2. 5. 10:51

봉숭아라고도 한다. 인도 ·동남아시아가 원산지다. 햇볕이 드는 곳에서 잘 자라며 나쁜 환경에서도 비교적 잘 자란다. 습지에서도 잘 자라므로 습윤한 찰흙에 심고 여름에는 건조하지 않게 한다. 높이 60cm 이상 되는 고성종(高性種)과 25~40cm로 낮은 왜성종(矮性種)이 있는데, 곧게 자라고 육질(肉質)이며 밑부분의 마디가 특히 두드러진다.

봉선화라는 이름은 《군방보(群芳譜)》의 기록에서 유래한다. 즉 《군방보》에서는 "줄기와 가지 사이에 꽃이 피어 머리와 날개, 꼬리와 발이 모두 우뚝하게 일어서서 봉황새의 형상을 닮아서 봉선화란 이름이 생겼다"고 하고 있다. 그 밖에 봉선화의 중국 이름은 금봉화(金鳳花)·소도홍(小桃紅)·길길초(吉吉草)·불두주(佛頭珠)·국비(菊婢)·해납(海蒳)·우객(羽客) 등 대단히 많고 또 봉선화로 손톱에 물을 들인다고 해서 염지갑화(染指甲花) 또는 단순히 지갑화(指甲花)라 하기도 하고 규중 여인들의 벗이라고 해서 규중화(閨中花)라고도 한다. 또 협죽도(夾竹桃)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목본인 협죽도와 이름이 같으므로 서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봉선화의 씨는 급성자(急性子)·한진주(旱珍珠)·은선자(隱仙子) 등으로 부른다. 또 투골초(透骨草)라는 이름도 있다.


봉선화 잎은 어긋나고 잎자루가 있으며 바소꼴로 양 끝이 좁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4~5월에 씨를 뿌리면 6월 이후부터 꽃이 피기 시작한다. 꽃은 2~3개씩 잎겨드랑이에 달리고 꽃대가 있어 밑으로 처지며 좌우로 넓은 꽃잎이 퍼져 있고 뒤에서 통상으로 된 꿀주머니가 밑으로 굽는다. 꽃빛깔은 분홍색 ·빨간색 ·주홍색 ·보라색 ·흰색 등이 있고, 꽃 모양도 홑꽃 ·겹꽃이 있다. 수술은 5개이고 꽃밥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씨방이 있다.
열매는 삭과로 타원형이고 이 있으며 익으면 탄력적으로 터지면서 씨가 튀어나온다. 공해에 강한 식물로 도시의 화단에 적합하다. 옛날부터 부녀자들이 손톱을 물들이는 데 많이 사용했으며 우리 민족과는 친숙한 꽃이다. 줄기와 가지 사이에서 꽃이 피며 우뚝하게 일어서 봉(鳳)의 형상을 하므로 봉선화라는 이름이 생겼다.

꽃은 7∼8월에 홍색·백색·자색 등 여러가지로 피며 2·3개씩 잎짬[葉腋]에 달리고 화축(花軸:꽃대)이 있어 밑으로 처지며 좌우로 넓은 꽃잎이 퍼지고 뒤에서 통모양으로 된 거(距)가 밑으로 굽는다. 과실은 삭과(窠果:열매의 속이 여러 간으로 나뉘고 그 안에 많은 씨가 들어 있음)로 타원형이며 익으면 탄력 있게 터지면서 황갈색 종자가 튀어나오는 자동산포(自動散布)를 한다.

봉선화가 우리 나라에 언제 어떻게 도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다정한 꽃이며, 일제시대에는 우리 조상들이 망국의 한을 노래하던 꽃이기도 하다. 여름철에 봉선화가 피면 소녀들은 봉선화 꽃잎에 괭이밥의 잎을 섞고 백반 또는 소금을 약간 넣어 빻아서 손톱에 얹고 헝겊으로 싸매어 손톱을 곱게 물들였다. 그 원리는 괭이밥에 포함된 수산이 손톱의 형질을 물렁하게 하고 소금이 매염제가 되어 봉선화의 물감이 잘 물들게 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이 봉선화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 온다.

고려 충선왕은 몽고에서 보내온 공주보다 조비를 더 사랑한다는 이유로 당시 고려를 지배하던 몽고의 미움을 받아 왕위를 내놓고 몽고 수도로 불려가서 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왕은 어느날 한 소녀가 자기를 위해 가야금을 타고 있는 꿈을 꾸었는데 소녀의 손가락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왕은 하도 기이하여 궁궐 안에 있는 궁녀들을 모조리 조사하여보니 한 소녀가 손가락을 흰 헝겊으로 동여매고 있었다. 왕이 그 소녀의 신분을 알아보니 고려에서 온 소녀인데 봉선화 물을 들이기 위함이었다. 왕은 남의 나라에 와 있으면서도 자기 나라 풍습을 지키는 것을 갸륵히 여겨 소상히 알아보니 소녀는 아버지가 충선왕파라 하여 면직당하고 여기까지 끌려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와 계시는 충선왕에게 준비한 가야금 가락을 들려 주겠다고 하였다. 그 가락은 왕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노래였다. 왕은 크게 감명하여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뜻을 품고 원나라 무종이 왕위에 오를 때 크게 도와 준 공으로 고려에 돌아올 수 있었다. 왕이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오른 뒤에 그 갸륵한 소녀를 불러오려 하였으나 이미 죽은 후였다. 왕은 소녀의 정을 기리는 뜻에서 궁궐 뜰에 많은 봉선화를 심게 하였다 한다.

또 백제 때 한 여자가 선녀로부터 봉황 한 마리를 받는 꿈을 꾸고 딸을 낳아 봉선이라 이름 지었다. 봉선이는 곱게 자라 천부적인 거문고 연주 솜씨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결국에는 임금님 앞에 나아가 연주하는 영광까지 얻게 되었다.

그러나 궁궐로부터 집으로 돌아온 봉선이는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님의 행차가 집 앞을 지나간다는 말을 들은 봉선이는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힘을 다하여 거문고를 연주하였다.

이 소리를 알아보고 찾아간 임금님은 봉선이의 손으로부터 붉은 피가 맺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매우 애처롭게 여겨 무명천에 백반을 싸서 동여매 주고 길을 떠났다. 그 뒤 봉선이는 결국 죽고 말았는데, 그 무덤에서 이상스런 빨간 꽃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그 빨간 꽃으로 손톱을 물들이고, 봉선이의 넋이 화한 꽃이라고 봉선화라 하였다.

어떤 이본에서는 자신의 부정을 의심한 남편에 대한 항거와 결백의 표시로 자결을 하고만 여자의 넋이 봉선화로 피어났는데, 그 씨를 조금만 건드려도 톡 튀어나가는 것은 자신의 몸에 손대지 말라는 뜻이라 한다.

또 민간에서는 봉선화가 활혈·진통·소종(消腫)의 효능이 있다고 하여 습관성 관절통, 월경통, 임파선염, 사교상(蛇咬傷) 등에 치료제로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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