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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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반데룽

심중에 남겨둔 말 한마디

까미l노 2015. 1. 31. 14:25

 

 

등나무 끝 덩쿨가지가 한 번 출렁거렸다.

 

나는 속도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서일까

시간은 수면제처럼 잔인하게 뜬 눈으로 천천히 나를 지쳐가게 한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아니었던가요?"

 

방심한 채 그녀의 몸에서 풀려나오는 화장품 냄새를 맡고있다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아스팔트에 집어던졌다.

아직 꺼지지 않은 담뱃불이 떨어지며 주황의 불꽃들이 파편처럼 아스팔트 바닥에 분분히 튀어 오른다.

 

내 안에 들어왔다고

내 안에 있는 다른 것들은 함부로 만지지 마십시오

당신은 내 몸을 당신의 곁에 온전히 붙여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으니까요...

 

나에게 맡겼으면 돌아다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아주 위험한 선택을 했었고

순식간에 맹렬하게 집중을 해서 무모하게 견뎌낼려고 했었습니다.

 

불쑥 그녀가 이런 말을 내뱉는다...

 

"누구나 그렇긴 하지만 당신은 밤과 낮의 모습이 달라

어둠이 깃들면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늙은 짐승으로 변하는 것 같아요..."

 

두 손으로 받쳐든 커피잔 속의 수증기가 뜨겁게 올라오면서

투명한 습자지에 물기가 베이듯 코 끝이 적셔지는 느낌이다.

 

커피잔을 내려놓을 무렵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릴 듯 귀가 투명해진다.

 

"펭귄은 어디에 살죠?" 남극인가요, 북극인가요?"

 

".....?"

 

"아마 북극이겠죠,"

 

"....?'

 

전쟁이라도 난 듯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내가 뭐라고 했던가....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겠죠,"

 

'아마 그럴테지요,.."

 

"집에 가면 누가 기다리고 있어요?"

 

"오래 전부터 애완견을 키우고 싶기는 했었지요,"

 

무슨 의미인지도 모를 말들을 주고 받다가 때론 묵묵부담으로 일관하는 나,

드디어는 좋아하게 되었을 무렵 그게 연민이었는지 혼란스러워진다.

 

"남녀의 사랑이란 게 자신과 상대에 대한 연민이 동시에 뒤섞여 있는 거 아닌가요?"

 

당신은 밤이면 화를 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댓바람에 전화를 걸어옵니다.

 

"어젯밤에 제가 술에 취해 당신에게 함부로 말을 했던 것 같아요,"

"화나셨나요,. 미안해요,"

 

"...."

 

"저 계속 만나주실거죠?

 

전화를 끊고나면 아마 그때부터 맹렬히 보고 싶어질 거라는 말은 목구멍으로 삼켜버렸다...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가졌던 것일까....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제대로 정의할 수 없지만 그때는 분명 사랑의 감정에 휩싸여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 그러는 것일까...

육체없이도 사랑이 가능하다고 믿은 것은...

 

한번 관계를 맺고나면 서로가 가슴에 품고 있던 찬란하던 빛 조차 이내 사그라들고 마는

모닥불 같은 그런 사랑은 두려울 정도였으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사이사이 흥분을 건네고

서로의 몸 깊이 숨결을 받아들인다.

침대 옆으로 가로로 길고 커다란 창문 밖으로 장대비가 퍼붓고 있다

멀리 자동차의 불빛이 빠르게 지나간다..

차라리 강설의 한겨울 밤이었으면 더 좋으련만....

 

자신은 순결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순결하지 않음을 스스로 치부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일까

이미 그럴 필요가 없어졌는데도 곧이 듣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사나운 꿈에 시달리다 아침녘에 잠에서 깨어보니 그녀는 이미 떠나고 없다.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되면 어서 빨리 떠나라는

자는 모습이 방금 링에서 내려온 권투 선수 같았다고 했다.

 

메모지 한장이 벽에 걸려있었다.

"제가 혹시라도 당신을 아프게 한건 아닐까요?"

 

"...."

 

"하지만 저 역시 아파요.

아마 그래서 끊임없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는 것 같아요.

삶은 불길한 미신을 믿는 것 같아요..."

 

"...."

 

"당분간 참고 전화하지 않겠어요.

묵묵히 견디며 기다리겠어요.

어느 날 문득 울릴 당신의 전화벨 소리를..."

 

"...."

 

"당신의 자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웬일인지 그만 울고 말았어요,

왜, 라는 물음따위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때 왜 제가 울게 되었는지를 묻게되면 대답해 주셔야 해요..."

 

".,..."

 

저 갑니다. 가고 있다구요,

그런데 왜 당신은 붙잡지 않는거죠?

 

"...."

 

마음을 물처럼 풀어놓고 그 물결이 흘러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오랫동안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헤여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방식은 아니기에 곧바로 상대와의 긴장을 조성하고 뒤로 물러나려는

이 자기방어적의 속성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요 몇 년 사이 난 극도의 소심증에 시달려야 햇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내 처지에 특별히 불만을 갖고 사는 건 아니다.

 

산다는 것은 단순한 견딤이 아니던가,

이것을 깨닫고 나면 세상에 불만을 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어리석은 일인지도 알게 될 것임에...

 

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만...

삶이란 애초부터 바둑판의 돌처럼

누군가 지정해준 행로를 따라 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아무리 기를 쓰고 몸부림쳐도 제 위치의 소극적인 영역을 벗어나긴 힘든다는데,

용케 행로를 이탈했다 해도 추락하는 곳은 신호등조차 없는 고속도로 한복판 같은 곳이라고

결국 사람들이 우굴거리는 세상에서 견뎌야만 하는 당연한 명제만 남게 된다고 한다.

 

오늘도 난 개 풀 뜯어먹고 트림하는 소리를 하고있다.

이 깊은 한밤중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