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내 나이가 어때서'는 이제 정말 그런 나이가 되어버린 것 본문

링반데룽

'내 나이가 어때서'는 이제 정말 그런 나이가 되어버린 것

까미l노 2015. 1. 26. 14:26

초등학교 6 학년 쯤 되었을게다

고향 동네 언덕 위 향교라는 옛날로 치면 마을 학교와 제를 지내는 곳이 되는데

도로에서 높은 곳이고 수십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이층 누각이 있고 그 안쪽 좌우에 디귿자로 된 서당같은 건물이 여럿 있다.

다시 계단 수십개를 오르면 역시 디귿자 형태로 건물이 산허리 아래를 빙 둘러선 모습으로 하고 있는 곳이다.

 

 

 

동네 청년들은 여름이면 그곳에 올라 노름 같은 것도 하고 남강에서 천렵으로 잡아온 물고기로

매운탕을 해먹기도 하던 가끔은 불량스런 일들이 생기기도 하여 파출소에서 일제 소탕을 하러오기도 했는데

이층 누각에서 잠 자다가 부지 불식간에 잡혀가기도 했다.

 

 

 

사진 정면의 이층 누각이 풍화루 라는 곳이고 왼편 빨간 지붕집 옆 초록색 작은 집이(당시 주소가 옥봉북동 향교주택 22호) 내가 살았던 곳이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 호롱불 때문에 창호지에 불을 냈던 적도 있었고 삐걱대는 나무대문 아래 볼록벽돌 동그란 구멍 속에 넣어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불속 찬합엔 말라붙어가는 밥이 점심시간에 집으로 밥 먹으러 오는 내 몫이었고 도시락 싸 가는 게 소원이던 때였다.

 

 

 

거기서 살다가 맞은편 길 건너 옥봉남동으로 이사를가서 내 유년기를 다 보냈었는데

아이들이 다들 거칠은 편이기도 했는데 사실 진주시에서 옥봉동이라고 하면 다들 혀를 내두르던 곳이었기도 했다...

 

 

 

최근 삼 사년 전쯤 가봤으니까 아마 저곳은 현재도 저 사진 속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저 향교 뒤의 산을 넘어가는 꼭대기에 느티나무 한그루가 서 있고 뒤로 내려서면 새미골이라는 마을로 가는 길에 조그만 암자가 하나 있었고

절집 아래 계곡에서 가재를 잡고있으면 스님이 막대기를 들고 쫓아오곤 했었다.

 

 

 

우리집 옆에 동창 명숙이가 살았었고 명숙이 할배한테 맨날 혼나면서 명숙이네 마당 뒤 산으로 가는 길에 커다란 밤나무와 참나무가 있었는데

그 둘의 열매가 정말 잘 생기고 탐스러웠기 때문에 우리는 늘 맹수기 할배한테 잡혀 혼쭐이 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또 숨어들곤 했었다.

맹수기 그 가시나도 지금쯤 누군가의 할매가 되어 나처럼 늙어가고 있겠지...

평생의 직장이었던  교직에서 정년퇴직을 한 후 평생 학교밖에 몰랐던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로

아들과 머느리 셋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셨던 황안나 선생님 

 

 

 

내가 운영하던 도보여행 카페에 참여하시게 되어 우리 땅 여러길을 함께 걸으면서 친해지면서 이모님으로 모셨었다.

안나이모는 한평생을 학교와 집 밖에 몰랐던 자신에게 퇴직을 한 후 무언가 획기적인선물을 하고 싶어졌고 집과 남편을 떠나보기로 하고서

산티아고로 떠나기 전 무작정 해남 땅끝을 출발 길따라 걷다가 산이 가로막히면 산을 넘으면서 결국 광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걸으셨다.

 

 

 

마중나왔던 남편이 거지꼴(?)을 한 이모님에게 내가 뭘 그리 잘못해줬다고 이렇게 까지 하냐고

뉴스거리를 접한 기자가 선생님 연세에 왜 그렇게까지 하시냐고 묻자 '내 나이가 어때서' 라고 우문현답을 해주고선 책을 썼는데

그 책의 제목이 '내 나이가 어때서' 였다.

 

 

 

25살 첫발령을 받아 간 학교가 경남 창원의 모여고

진주에서 출퇴근을 하기엔 거리가 좀 몰어 생활관이라는 곳에서 지냈었는데

당시 껌 꽤나 씹었던 녀석들 몇이 수업시간 떙땡이를 친고서 내 방에 몰래 숨어들어 놀다 가곤 했었던 모양이다

 

 

 

어느날 학교 내 순시를 하던 교장선생님에게 이녀석들이 내 방에서 놀다가 들켰던 모양인데

한녀석이 내 앨범을 통째 훔쳐가는 바람에 난 어릴적부터 군생활 때 까지의 사진이 남아있지 않게 됐다...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능력이란 게 있을 것이고 그 능력이란 게 할 수 있는 능력을이 여럿 가졌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안타깝게도 보통사람의 개인적인 능력으로는 겨우 한 두가지 외엔 온통 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그렇다고 하지 않아도 되는 능력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다행일텐데...

할 수 있는 능력보다는 하지 않아도 되는 능력이 더 어려운 거 아닐까?

 

 

 

 

살아 오면서 행복하지 못했다거나 무지 신날만한 일 많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스스로가 해낼 수 있을법한 능력을 찾아서 평생을 살아내던 일이 스트레스였을테고

반대로 부모 잘만나서였든 로또대박을 했든 지 잘나서 입신출세를 한 사람이라면

하지 않아도 되는 능력이 없다고 스트레스 받기도 했을법 한데...

 

 

 

좀은 괴변 같기도 하지만

뭐든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 보다

 

 

 

커서를 움직여 과거 어느 시점으로 갈 수 있거나 성능 괜찮은 타임머신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수 십년동안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거리며 할 수 있을만한 능력을 찾다 찾다 포기해버릴 무렵에 찾게된

하지 않을 능력이란 것을 찾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능력이라는 이 자유로움을 뭐든 잘 할 수 있는 능력따위에 비하랴,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하지 않아도 되는 능력이 더 어렵지 않을까 싶다는  말이지,

 

 

처음 그 자리는 아니지만 이곳에서도 대략 수 십년동안 팥물찐빵을 팔고 있는 진주 수복빵집

꿀빵 찐빵 팥빙수 단팥죽 라면을 판다.

흔히 볼 수 있는 찐빵과는 다르게 크기가 딱 한입만하고 찐빵 위에 뜨거운 팥물을 얹어준다.

 

 

 

내가 중학교 때부터 드나들던 찐빵집이고 그 당시엔  전체 도시의 중고등학교 교사연합으로 지도를 하던 때인데

학생은 방과후 사복 차림으로 빵집 같은 곳에도 마음대로 다닐 수 없었던 때였다.

하지만 이곳 빵집에서 교복을 입은 채 있으면 건전한 곳이라고 봐주기도 했던 착한(?) 빵집이었다.

 

 

 

아마 한 50년은 이 모습 이대로 탁자며 주전자등이 바뀌지 않은 채 찐빵을 팔고 있는데

모방송국에서 맛집으로 촬영을 요청해도 아저씨는 귀찮다고 거절을 했고 오거나 가거나 인사도 할줄 모르는 무뚝뚝한 분이다...^^

마지막으로 갔었던 게 2년이 넘었고 8개 2천 원이었었는데 지금은 한접시에 몇개를 주는지 얼마를 하는지 궁금하다.

고향 진주에 가면 꼭 들리는 사천냉면과 제일식당 해장국과 함께 반드시 들리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