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창간 소설 삽화를 그리면서 4·3 역사 그림에 큰 뜻 둬 천하는 내가 살고 내가 죽는 곳, 제주는 우주의 중심, 가치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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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 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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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덕화사(貴德畵舍)의 진인(眞人)
강요배의 화실은 '귀덕화사'로 통한다. '귀덕에 있는 강요배의 화실'이라는 뜻이다. 나무대문을 들어서면 생태를 알기 위해 직접 씨를 뿌려 가꾼 황근, 감나무, 파초일엽, 무환자, 으름, 수선화 등 각종 나무와 꽃들 사이로 풀벌레 소리가 흐른다.
강요배는 1952년 제주시 삼양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술대학 진학 전까지 약 20년 동안을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했다고 술회한다. 마을 도서관에서 빌려본 그림책들은 화가에 대한 동경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그가 그린 소년시대의 작품을 보면 탁월한 상상력과 성실성이 엿보인다.
197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한 강요배는 창문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당시 중경고등학교에 근무하던 화가 박재동과 서로 의논하면서 개방적 미술교육에 힘썼다. 이 무렵 '현실과 발언'이 태동하고 있었다. 강요배를 '현실과 발언'에 영입하기 위해 미술평론가 성완경이 찾아왔다. 1981년 이청운과 함께 '현실과 발언'의 새로운 회원이 되었다. 그해에 제2회 동인전 '도시와 시각'전에 출품하였고, 이듬해에 박재동을 '현실과 발언'에 참여시켰다.
교사로서 '현실과 발언'에 참여한 강요배는 학교 미술실에서 작품제작을 하였다. 세로 2m, 가로 7m가 되는 대형 작업을 하였다. 이때 '우리의 땅 탐라(1982)' '대동(1983)' '맥잡기(1983)' '장례명상도(1983)' 등을 제작하였다. 그는 자신의 미학적 입장을 "내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현실의 직접적 모습도 아니고 근원적인 상징도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그것은 생존의 지평 그 복판을 흐르는 인간의 뜻의 문제이다"라고 밝혔다. '생존의 지평 그 복판에 흐르는 뜻의 문제'는 줄곧 그의 예술의 저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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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始原), 38.7x53.2㎝, 종이·펜·먹·붓, 1989년, 작가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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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향의 아픔 4·3을 그리다
3년간의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금성사 계열의 회사에서 다른 화가들과 함께 다양한 일러스트를 그렸다. 그러나 회사가 어려워 1988년에 그 일도 그만 두었다. 이 무렵 한국 근현대사에 대해 감을 잡게 되었고 4·3에 관심을 쏟았다. 마침 1988년에 한겨레신문이 창간되면서 소설가 현기영의 '바람 타는 섬'삽화를 그리게 되었다. '바람 타는 섬'은 1930대 초 일제강점기 세화리 잠녀(潛女)항쟁을 다룬 소설이다. 제주 잠녀들의 생존권 투쟁이 항일운동으로 발전한 과정을 그린 것이다. 삽화를 그리는 1년 동안 제주역사를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서술적 형상화(내러티브)에 대한 관심과 함께 4·3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일었다.
1989년 삽화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4·3공부에 매진했다. 당시 4·3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책을 모두 구해서 6개월 동안 노트 정리와 도표정리를 하면서 암기할 정도로 열중하였다. 특히 4·3 증언 채록집 '이제사 말햄수다'는 4·3의 아픔과 진실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는 서울 안에서 제주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4·3을 세계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눈이 열렸다. 4·3을 '수난'으로 볼 것인가 '항쟁'으로 볼 것인가. 결국 누가 무엇 때문에 누구를 죽였느냐는 학살의 측면에서 '항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강요배는 4·3을 그리기로 결심하고 경기도 덕은리의 한 쇠락한 농가를 빌렸다. 기울어진 슬레이트 지붕 아래 방 두 칸을 터도 겨우 5평 남짓했다. 겨울이면 한파 때문에 집 둘레를 비닐로 둘러쳐야 했다. 후배들을 모델로 하여 4·3의 인물을 표현하였다. 심리적 거리감이 있으면 상상력이 더욱 뚜렷한 것인가. 4·3이 있었던 1948년의 제주이야기가 강렬하게 가슴으로 다가왔다. 3년 동안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4·3 그림 50점을 완성할 수 있었다.
1992년, 만 40세의 강요배는 '강요배 역사그림 - 제주민중항쟁사(4월 1일~11일까지 학고재 화랑)'전을 선보였다. 이렇게 4·3의 리얼리티는 세상에 알려졌다. 도상(圖像)은 사상에 앞서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서울전시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아름다운 삼다도에서의 엄청난 학살은 관람객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제주를 다시 인식하게 만들었다. 서울전시를 마치고 검증과정을 거치듯 제민일보 주최로 세종갤러리에서 제주전시를 열었다.
슬픔과 분노로 얼룩진 4·3의 역사화를 그리고, 전시회를 마친 강요배의 심신은 지쳐있었다. 더 이상 서울 생활이 의미 없다고 생각한 그는 바로 7월에 영구 귀향을 위해 제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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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파람, 캔버스에 유채, 72.7x116.8㎝, 1992년, 개인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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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력을 알면 자연도 경이롭다
작은 배낭 하나에 카메라 한대, 40만원을 들고 제주에 돌아온 강요배는 옹포리 농가에 세를 들었다. 고향 제주는 어머니 품처럼 포근했다. 4·3을 그리기 위해 서울에서 구입했던 1/25,000 지도를 들고 제주의 자연을 찾아 나섰다. 제주 구석구석을 걷고 걸으며, 마을과 오름의 내력을 알았다. 제주의 역사를 알고 나니 사물의 모습도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마침 김종철의 '오름나그네'가 신문에 연재되자 오름의 정보를 빨리 습득했고, 고등학교 동창생들 모임인 '조베기 산우회'와 함께 오름 답사를 다녔다. 그 무렵 '황무지' '백파', '마파람' '산꽃'등 제주 자연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그렸다.
옹포리에서 1년을 지내고 외도로 집을 옮겼다. 동산에 소나무가 있는 외진 곳이었다. 너무 외진 곳이라고 하여 사람들은 당호(堂號)를 '귀곡산장(鬼哭山莊)'이라고 불렀다. 도 내·외 미술인들이 자주 찾아와 합숙하면서 열띤 토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1994년의 '제주의 자연'전은 귀향 후 옹포리서 1년, 외도에서 1년 정도 지낼 때 그린 그림들이다. 자연의 내력을 알게 되면 사물을 달리 볼 수 있다. 대상을 피상적으로 보게 되면 대상 자체를 조형적 형식으로만 보게 되므로 아름다운 절경(絶景)이 그림의 중심이 된다. 그런 시각은 이미 서구에서 비롯된 시각으로 남의 눈을 통해 자신의 땅을 해석하고자 하는 행위로 귀결된다.
제주 섬, 섬땅의 시선으로 보면 해질 녘 옥수수의 흔들림도 가슴 저미도록 황홀하다. 잠녀들의 노동과 생산을 알지 못하면 바다 속 풍경을 볼 수가 없다. 농민들의 생활과 의식, 지질의 특성을 알게 되면 콩밭, 조밭도 새롭게 보인다. 참깨꽃, 참외, 수박, 선인장, 보리밭, 인동꽃, 무꽃, 억새 등이 중심 대상으로 다가왔다. 삶의 풍경에는 따뜻한 날, 안온한 날 뿐만 아니라 밤, 폭풍이 칠 때, 혹은 비올 때마다 저마다 다른 감정이 담겨야 한다.
'제주의 자연'전은 강요배에게 새로운 명성을 안겨 주었다. 기존 풍경화의 개념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 사회적 맥락과 사물의 내력을 적용하여 사물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드러나지 않는 살의 느낌은 보이지 않는 강요배의 특징으로 되살아났다.
'제주의 자연'전 또한 성공리에 끝났다. 하귀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서 7년 동안 작업을 하였다. 1998년 8월 강요배의 눈은 다시 금강산으로 향했다. 처음 가 본 북한의 산천은 자연의 순수성으로 가득 찼다. 가는 곳마다 미개발 상태였고, 길 자체가 수공으로 열리니 어찌 순수하지 않으랴. 강요배는 내금강의 상징인 '금강초롱'을 보는 순간 환희를 느꼈다. 지구를 통틀어 금강산에만 유일하게 피는 금강초롱. 복제로 넘치는 인간세상과 달리 금강산은 태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구절초, 금불초, 해당화와 만났다. 이듬해 5월 학고재에서 '금강산'전을 개최하여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 천하는 내가 살고 내가 죽는 곳
강요배는 '우주의 중심은 제주'라고 생각한다. "천하는 내가 살고 내가 죽는 곳이다. 천하란 어디인가. 바로 내가 선 곳, 내가 있는 이 땅이다."
그래서 강요배에게 가장 소중한 곳은 바로 제주가 된다. 제주는 그에게 시간적 축으로 보면 지질시대에서 현대까지 엄청난 상상을 펼칠 수 있는 곳이다. 역사 또한 세계사의 중심에 있는 곳으로서 우주적 상상력을 넓힐 수 있는 공간이 된다. 하늘길이 열려 세계와 통하니 과거처럼 공간적으로 격리되지도 않는다. 뉴미디어 시대의 도래는 물리적 움직임이 우월했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는 누구나가 다 중심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강요배의 제주의 자연은 점점 단순화하고 있다. 그림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고 생각해서일까. 최근의 그림들은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해체한다. 자연에, 태초에 있었을 골격만 남긴 듯, 아니면 빛의 작용이 만물 생성의 근원인 듯 내러티브를 서서히 거두고 있다.
이제 강요배는 제3의 시선을 찾고 있다. 그는 물결, 숨결의 '결'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결'을 타는 것은 춤을 추는 것과 같다. 그림에 저절로 동화되는 것, 말이 필요 없는 그림, 비로소 말을 버릴 수 있는 그림을 위해서 리듬을 타려고 한다. 강요배는 이것을 육화의 전략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결의 작용'에 다름 아니다. 제주대학교박물관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