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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된 남성미 바리메오름

까미l노 2012. 11. 13. 16:26

"절제된 남성미에 경관 또한 빼어난 오름"
[다시 걷는 오름 나그네] <18>바리메
등록 : 2011년 09월 07일 (수) 09:43:16
최종수정 : 2011년 09월 07일 (수) 09:43:16
김철웅 기자 jemin9062@yahoo.co.kr

▲ 납읍마을 공동목장에서 바라본 바리메 서면
군살 없는 탄탄한 근육질 느낌의 웅장한 산체
제주시서 20㎞·탐방 50분 등 2시간이면 충분

바리메의 매력은 절제된 남성미다. 산체가 바디빌더처럼 웅장함은 없지만 빼어난 단거리 육상선수처럼 강인한 근육질의 느낌을 주는 오름이다. 산체를 구성하는 능선도 '군살' 없이 탄탄하다. 중앙에 품은 분화구를 형성하는 능선은, 그러나 적당한 높이와 경사각으로 지나치지 않은 '터프함'을 과시한다. 바리메는 빼어난 경관도 자랑이다. 사방이 탁 트여 주변의 화산평탄면 위에 떠있는 오름들은 물론 한라산 정상까지도 눈에 들어온다. 특히 바리메 자락에 있던 원동마을이 4·3의 광풍에 사라지는 아픔의 현장도 지켜봐야 했던 오름이다.

바리메는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 산1번지, 평화로 동쪽에 웅장한 산체를 갖고 있는 오름(표고 763.4m)이다. 비고가 213m로 도내 368개 오름 가운데 8번째로 높고 면적은 128만8365㎡로 군산(283만6857㎡)·어승생악(254만3257㎡) ·영주산(133만8920㎡)에 이어 네 번째로 넓다.

오름의 모양이 승려들의 밥그릇, 즉 바리때(또는 발우·鉢盂)를 닮았다고 하여 바리메라 부른다고 한다. 오름의 봉우리가 방향에 따라 하나 또는 둘로 보이는 데다 오름 중앙의 분화구의 모양 또한 바리때와 비슷해 분화구 모양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반론'도 들린다. 남쪽에 인접한 족은바리메와 구분해 큰바리메, 발이오름이라고도 칭하고 한자로는 발산(鉢山)이다.

 

▲ <바리메오름 탐방로>

A=주차장 B=탐방로 입구 C=하단부 갈림길 D=정상부 갈림길 E=정상(남봉) F=북봉 G=분화구 H=바리메오름 진입로 I=어음제1교차로 J=평화로 K=원지 비석 L=족은바리메오름 탐방로 입구 M=홍골 N=엘리시안골프장

바리메는 제주시(신제주로터리)에서 20㎞ 떨어져 있다. 평화로를 17㎞ 타고 가다 산록서로(1117번 지방도)와 만나는 어음제1교차로에서 좌회전, 어리목 방향으로 1.3㎞ 가면 시멘트포장 길과 교차하는 사거리 왼쪽에 '바리메' 표석이 있다. 표석 맞은편 한라산 방면으로 시멘트포장길을 약 2㎞ 올라가면 바리메 주차장(탐방로 지도 A)이다.

올라가는 입구(〃B)는 2개이나 어느 곳으로 가든 5분 안에 갈림길(〃C)서 만난다. 다시 능선을 타 7~8분이면 정상부 갈림길(〃D)이다. 시계 방향으로 좌회전, 제주조릿대 숲길을 헤치고 채 10분을 거르면 최정상(〃E)이다. 정상에선 북동쪽의 굇물오름과 노꼬메큰오름·족은바리메·천아오름, 거대한 산체의 어승생악·붉은오름과 한라산 정상까지 보인다. 이어 다래오름·돌오름·빈내오름·폭낭오름·괴오름·북돌아진오름·새별오름·이달봉과 촛대봉 너머 금오름도 눈에 들어온다.

남봉까진 수림에 가려 분화구가 보이지 않는다. 남봉에서 내리막을 타서 5분여를 가면 식생의 키가 무릎으로 낮아지면서 분화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화구의 남쪽은 수림이고 북쪽은 초지로 형성된 탓이다. 깊이가 78m에 바닥 둘레가 약 130m이나 물을 괴어 있지 않다. 조금 나아가면 두 번째 봉우리인 북봉(〃F)이다. 이곳도 사방이 탁 트여 멀리 산방산·비양도까지 보인다. 역시 바리메 정상의 경관은 압권이다.

한라산과 해안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위치한 오름 덕분이기도 하지만 바리메에서 북서쪽으론 해안까지 오름이나 곶자왈 등 특이한 화산지형이 없고 용암이 흘러내린 화산폭발 당시 평평했던 원지형이 그대로 유지돼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경관을 뒤로 하고 발을 떼면 10분만에 정상부 갈림길이다. 하단부 갈림길을 거쳐 내려오면 다시 10분, 출발한지 50분 정도다. 제주시에서 20㎞ 거리 왕복 운전시간을 감안하더라도 2시간이면 탐방을 끝낼 수 있는 '깔끔한' 오름이다. 하지만 출발부터 정상부 갈림길까지 계속해 가파른 오르막이어서 구간별 난이도는 '상-중-하'로 볼 수 있다. 오르내리는 탐방로가 가팔라서 지팡이가 도움이 된다.

▲ 바리메 남서자락의 홍굴
바리메 남서쪽 자락에는 '홍굴'이라는 샘이 있다. 옛날엔 물을 콘크리트 도수로로 끌어와 유용하게 사용했었지만 지금은 마을목장인 그곳까지 수도가 들어와 물오리만 놀고 있을 뿐이다. 특히 홍굴은 인간들의 삶의 터전을 내주었으나, 그 때문에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 아이러니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948년11월13일 4·3 토벌대에 의해 주민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한 뒤 지도에서 사라져버린 원동(院洞) 마을 얘기다. 홍골이라는 물이 없었으면 중산간에 마을이 생길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학살의 비극도 잉태되지 않았을 것이란 역사의 '만약(If)'이 그것이다.

애월읍 곽지 출신인 김창집 탐라문화보존회장은 "원(院)이 있기 위해선 물이 있어야 한다. 물론 가까운 냇가에 물이 있긴 했지만 원동 사람들은 홍굴의 물을 먹고 살았다"고 말했다.

바리메는 주변보다 젊은 화산체로 앞쪽의 화산평탄면이 형성된 뒤 분출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강순석 제주지질연구소장은 "화산평탄면은 수십만년 전에 족은바리메를 비롯, 괴오름·다래오름·새별오름 등에서 분출된 용암류로 형성된 것"이라며 "바리메는 이후 수만년 전에 송이(scoria)를 주체로 분출한 분석구로, 경사와 분화구 등 화산원지형을 보유하고 있는 기생화산체로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 바리메 가는 길의 물봉선
▲ 방울꽃

 

 

 

 

 

 

 

바리메의 식생은 산딸나무의 우점도가 매우 높은 가운데 까치박달·때죽·팥배·고로쇠·개서·비자·단풍나무 등이 분포하는 2차림 식생을 나타내고 있다. 하층은 오름 내외사면에 제주조릿대가 주로 우점하나 인위적 간섭이 적은 탓에 방울꽃·개승마·새끼노루귀·물봉선·파리풀·추분취·남산제비꽃·혹쐐기풀·진범·큰천남성·속단 등 독특한 초본식물도 자라고 있다.

관목층에는 상산·산수국과 사람주·떨꿩·새비·쥐똥나무 등이, 북쪽 정상부에는 고추나무와 보리수·국수·가막살나무 등이 우점하는 관목림이 형성돼 있다.

김대신 한라산연구소 연구사는 "바리메의 식생은 인접한 노꼬메오름과 유사하지만 초본식물 분포에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며 "주변이 경작지나 방목지 등으로 고립돼 있고 배후에 한라산 중턱의 삼형제오름으로 이어져 식물 종의 피난처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오름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글·사진 김철웅 기자

◇기획 ‘다시 걷는 오름나그네’전문가 자문단
▲인문=김창집 탐라문화보존회장·소설가 ▲역사=박찬식 역사학자 ▲지질=강순석 제주지질연구소장 ▲식생=김대신 한라산연구소 녹지연구사 ▲정책=김양보 제주특별자치도WCC총괄팀장

사라져버린 마을 소길리 '원동'
4·3 당시 주민 무차별 학살 폐허
42년만의 무혼굿, 지금은 비석만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 원동(院洞) 마을은 제주목(濟州牧)과 대정현(大靜縣)을 잇는 '웃한질(上大路)'의 중간지점에 위치, 조선시대부터 나그네가 쉬어 가는 주막이 있던 마을이다. 1948년11월13일 토벌대의 주민 대학살로 지도상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원동은 평온했다. 4.3사건이 한창이었고 이른바 '초토화작전'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원동만은 광풍을 피하는 듯 했다.

전체 주민이 60여명에 불과, 무장대로 활동할 만한 청년 숫자가 적었기 때문이다. 경찰도 "폭도들에게 협조하지 마라"는 경고만할 뿐 주민을 구타한 적도 없었고 무장대 역시 이따금 내려와 연설은 해도 소출이 적은 이 마을에 식량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1948년 당시 대부분 주민들은 농사를 지었고 1가구는 주막집을 운영했다. 사건이 발생한 11월13일에도 대정면에서 제주읍으로 가는 길에 원동에 머물며 쉬던 사람들이 있었다.

증언에 의하면 군인들은 새벽 5시께 마을에 들어가 주민들을 결박, '무장대'를 찾기 위해 마을 주변을 종일 굶긴 채 끌고 다니다 오후 5시께 주막집 앞으로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총살을 자행했다.

군인들은 온 마을을 뒤졌지만 무장대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64세의 할아버지부터 4세 어린이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했다. 34명이 희생당했다. 제사 등으로 마을 떠나 있던 몇몇 어른과 어린애들만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모두 고향을 등지면서 마을은 폐허가 됐다.

어린애로 구사일생했으나 이리저리 흩어져 머슴살이 등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유족들이 사건 발생 42년만인 1990년 9월 22일부터 마을 터에 모여 한을 달랬다. 사흘동안 억울하게 죽은 가족들을 위로하는 '원동마을 4·3무혼굿'이 펼쳐졌다.

지금은 마을 입구에 세워진 '4·3유적지 표지'와 '원지(院址)'라 쓰인 비석만이 한때 마을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김철웅 기자

▲ 마을 입구에 세워진 ‘4.3유족지 표지’와 ‘원지(院址)’라 쓰인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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