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다시 이제부터 #1 본문

측은지심

다시 이제부터 #1

까미l노 2007. 11. 22. 00:57

배낭을 꾸리는 연우의 손놀림이 예전 같지 않다.

한두 번 하던 짓거리도 아닌데 벌써 몇 번째 이러고 있는지...

 

아래에서부터 차례로 침낭이며 옷가지를 넣은 후

텐트 버너 코펠 등속이 반듯하게 각이 지면서 채워져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오늘은 계속 꾸려놓은 베낭이 허리 굽은 노인의 등 마냥 휘어지면서

벽에 기대어 세워도 자꾸 쓰러져 버린다.

 

아닌 줄 알면서도 연우는

쓰러지는 반대편에 스틱을 하나 더 우겨 넣는다.

 

마치 척추이상 환자가 등허리에 철심을 박고서

허리를 펴듯 그제서야 배낭 은 제 키 높이를 다 뽐내며 제대로 선다.

 

지금 연우는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이 연민에 화가 나있는 것이다.

오전 사무실 회의중 뜬금없이 그녀의 연락을 받았던 것이다.

 

이혼 후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전화를 하곤 하던 그녀이긴 했었지만

비 도 오지 않는 아침 나절의 전화라 연우는 조금은 의아해 하면서도

하도 다 급한 목소리 였던지라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그녀가 살고 있다는 집 근처 에 갔을 때

저만치 앞 길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여자를 발견하고

연우는 또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 시작한다.

 

가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한 생각도 들기는 했었지만

초라하고 불쌍한 형편이 되어서 도움을 청하려는 건 아닌가 싶어서

짐짓 마음을 다잡은 채 왔던 자신의 옹졸함을 들킨 것 같아서다.

 

길바닥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아 있던 여자를

부축해서 일으킨 연우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는 적잖이 놀란다.

 

긴 생머리는 온데간데 없이 새로 한 건지

퍼머를 한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 이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이 완연한 병색의 환자였다.

 

찡그린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빨리 병원으로 좀 데려다 줄 수 없냐고

애절한 눈빛으로 연우를 건너다 본다.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 까닭모를 화를

애써 삭이면서 연우는 급히 차를 몰 아 근처 병원 응급실로 달리면서

연우는 이런 경우에도 그닥 놀라지 않는 스스로의 차분함에 또 다시 화가 난다.

 

점점 타성에 젖어가는 생활을 하고있던

자신의 모습과는 반대로 냉정해지고 있는 이중성이

아픈 그녀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도 않아 연우는 괜스레 미안해 하고있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당한 연우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주 느린 속도로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링겔 병 속에서

방울방울 빠져나오는 노란 액체 를 따라 시선을 가져가던 연우의 눈에

파리하게 드러난 그녀의 종아리가 들어 온다.

 

또 다시 연우는 마음이 아프다.

내키지 않아 할 병원 담요지만 끌어다 덮어주려는데

 

"연우씨!"

 

"..............."

 

"미안해요, 연락 할 곳이 연우씨 밖에 없었어요,"

 

"남자 친구는 어디 가고?"

 

퉁명스럽게 내뱉은 연우는 속으로는 미안해하면서도

괜스레 그녀에게 야속하게 대하는 스스로를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언제라도 '툭'하고 튀어

나올 준비가 되어있는 말을 숨긴다.

집 나갈때의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그꼴이냐고...

 

"그놈이 다 그놈 이었어요"

 

"..................."

 

"연우씨!"

 

"말해...."

 

"저....너무 추워요,"

 

 

애써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외면하면서

그녀의 다리라도 마사지 해줘야 할 것 같아

담요 아래로 손을 가져가던 연우는 손끝에 느껴지는 차가움에 섬뜩해져

슬그머니 손을 거두면서 그만 그녀의 눈을 보고 말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진 그녀의 눈과 마주치자

연우는 그만 그 자리를 일어나 밖으로 나와버렸다.

집으로 데려다 주던 차안에서 그녀는

연우에게 뜬금 없이 하나의 제안을 했 었다.

 

"연우씨!"

 

"......"

 

"나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면 안되나요?"

 

"............."

 

"연우씨 따라서라면 어디로든 갈께요,"

 

오전에 잠시 일어났던

그 일들과 느닷없는 그녀의 제안으로

연우의 머리 속은 아득한 옛일로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던

기억들이 떠올라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날따라 아내에게 잘해줄려고 일찍 귀가를 하면서

빨간 장미 한 다발과 자수가 곱게 수 놓여진 예쁜 속옷을 사고.

지날 때마다 한 권씩 사주기로하면서부터 늘 들르던 그 서점에서

버릇대로 마음에 드는 제목만으로 책 한 권을 골라서 집으로 향했는데...

 

새로 사 온 책을 다 읽고 수북해진 재떨이에는

간간이 피웠던 담배꽁초가 넘칠 때까지도 그녀는 귀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책은모 여류작가의 단편소설로

주인공인 화자가 아내를 기다리다가

뜬 눈으로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인데.

 

눈을 떴을 때는

남자가 책을 읽으면서 기대어 잠들었던

소파의 맞은편에 아내가 앉아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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