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다시 이제부터 #2 본문
----어스름 새벽에 밝아져오는 여명을 등진 채
앉아있는 아내의 모습에 나는 그만 괴기한 악몽을 꾼 듯이 비명 같은 것을 질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그때 직감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여자가 무슨 일을
내려고 작정했구나, 하는 것이었다.
이미 아내의 얼굴에는 죄의식이나
두려움 같은 것은 떠올라있지 않아 보였다.
아내는 남의 집에 잠깐 들어와
집 주인을 내려다보는 듯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너....남자 있니?
담배를 연거푸 두 대나 더 피운 후
나는 겨우 입을 열어 그렇게 물었다.
아내는 여전히 아무 표정이 없거나,
혹은 너무 많은 표정이 겹쳐있어서 전혀 구분조차 할 수 없는 그런 표정....
아내가 두 번째 외박을 했을 때
이미 한차례 아내의 몸에 손을 댄 적이 있었기에
나는 가급적 다시 그런 짓을 하지 않기 위해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말을 안 하는 건...인정을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니?"
"....그래."
아내는 그렇게 말했다.
탁자 위에 올려져있던 담뱃갑이
아내의 얼굴로 날아간 것은 아내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밤새 아내를 기다리며 했었던 수많은 의혹과 상상의 그림들,
그리고 그에 맞서기 위해 준비해두었던 수많은 대처 방안들은
그 순간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때 내가 아내에게 맞서 준비해두었던 자세는
무엇이었는지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가 없었고
더 이상 담뱃갑을 집어던지는 따위의 행동은 하고싶지도 않았다.----------
평소 속도감을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연우는 아까부터 속도계의 바늘이
위험수위를 쉬 넘어서는 것도 모른 채 설악산으로 내달렸다.
사무실엔 미스김에게
당분간 연락 안될거라며 찾지말라 그랬으니
돌아오지 않아도 되니까,
돌아와야 될 아무런 희망이나
기대감이 없어져버린 듯한 상실감으로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악을 써 따라 부르며,
44번 국도를 따라 한계령으로 올라섰다.
--아름다웠던 날이 지나고
차가운 바람에 갈길 잊었나
돌아볼 수도 없이 찾아갈 수도 없이
내 눈은 발끝만 보고있네
나는 이제 어디쯤 온 건가
아직도 대답은 들리질 않네
어디로 가야하나,
어디쯤 온 건가
내 눈은 햇빛에 어지러운데
머리카락이 내 눈 가리고
내 손은 만질 것이 없으니
다시 가야겠지,
다시 가고싶어
다시 시작될 내일이 있으니
다시 가고싶어
다시 가고싶어
다시 시작될 내일이 있겠지
-번안- 전인권 미 발표작 '다시 이제부터'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연우를 막아선건
짙은 어둠보다 먼저 날라온 퉁명스런
중늙은이의 고함소리 였다.
"이봐요! 어디 가요?
오늘 폭설로 대청봉 입산금지에요"
어둑어둑해지는 산길을 따라
어수선한 생각들 속을 헤집으면서도
아이젠을 하지 않은 발이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디딜 자리를 살피며 걷느라고 산림청 직원이 몇 번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는가보다.
등산객이 없어서 딴전을 피고 있다가
연우가 등산로로 들어선걸 뒤늦게 발견하곤
양손으로 확성기를 만들어 냅다 소리를 지르는
영감의 목소리엔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원래 오늘 대청을 오를 계획은 아니었었다.
그저 발길닿는대로 가다보니 등산로로 접어들었을 뿐이지만
산의 냄새도 맡기 전에 입산을 제지당하자
그 예 마른 가랑잎처럼 바스락대던 연우의 마음이 한없이 막막해진다
연우는 하릴없이 발걸음을 되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간다?'
설악산에만 가면 누가 반겨주리라고 기대하며 떠난 길은 아니었지만
막상 산행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자 적잖이 실망이 크다.
'사람은 배신을 해도 산! 너만은 언제나 나를 받아 안아주었는데
오늘은 너 마저 나를 밀어내는거니?'
연우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참았던 담배 한 대를 입에 문다.
"이봐요! 거 오색에 내려가서 온천욕이라도 하시고 가시지..."
폭설이 자기의 책임도 아닌데
연우의 허탈한 발걸음이 못내 미안한 듯
아까 와는 백팔십도로 바뀐 부드러운 영감의 목소리에
연우는 그저 싱긋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보폭을 크게 하여 서둘러 산길을 벗어난다.
"아저씨! 여기 뜨끈한 국물있어요"
반쯤 열려져 있는 매점 문안에서
호객을 하는 주인아주머니의 목소리에
연우는 눈을 들어 매점 문에 적힌 메뉴를 읽는다.
오뎅 감자전 설렁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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