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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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반데룽

못다한 말

까미l노 2015. 6. 9. 17:21

 

출장간 사이 집을 나간 아내

남편과 자식밖에 모르는 '착한여자'인 줄 알았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우리 사이에 틈이 생긴 것일까?

그녀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그 가운데 하고 싶었지만

못 다해서 억울할 수도 있었던 말

억울키는 커녕  유치해서 못 다한 게 아니라 그냥 아니한 것일 수도 있을 말...

 

 

'현대판 종교화' 라는 화가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치유의 힘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미술가이자 신학자인 딜렌버거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빠져있다가 절망의 나락에서 벗어나 보려고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보러갔다.

 

로스코의 최근작인 듯한 그림 앞에서 그녀는 털썩 주저 앉았다고 한다.

화염이 몰아치듯 온통 시뻘겋게 그려진 그림은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한다.

1970년 2월 화가는 자기 작업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뉴욕의 신문들은 위대한 화가의 자살을 톱기사로 알렸었다.

 

 

 

중년의 사내가 해외 출장을 다녀왔을 땐 아내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후였다.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선 집안은 어두컴컴하고 무덤처럼 서늘하면서 괴기스러운 듯 했다.

 

근처 마트에라도 갔으려니 소파에 앉아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시계가 밤 열한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를 않는다.

라면 한개를 끓여 먹고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이젠 아예 꺼져 있다.

 

그러고 보니 베란다에 빨래 같은 것도 한장 걸려있지를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출장 가던 날의 작은 말다툼

해외로 가는 출장이니 따라가면 안 되느냐는 물음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물끄러미 쳐다봤더니 말끝을 흐린다.

 

"외로워서.혼자 있으면 무서워서"

묵혀둔 짜증이 인다.

"그러게 왜 애는 지방대로 보내가지고 어떻게든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냈어야지"

목덜미가 붉어진다.

아차 싶었지만 늦었다

 

"됐어.잘 갔다 와요."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나왔지만 아내는 말이 없었다.

손을 흔들었으나 그녀의 눈은 이미 허공을 맴돌고 있었던 것 같았다.

 

 

" 혹시 언니 거기 안 갔어?"

온갖 어지러운 생각 끝에 밤을 꼬박 지샌 후 처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에겐 가끔이라도 만나는 친구 한명도 없다.

한 번도 친구를 만나러 가는 갈 본 적이 없었다.

 

장모는 당신 큰딸에게 집귀신이 붙었다고 혀를 찰 정도이다.

딸이 지방의 대학을 다니고 부터는 베란다에서 허브 키우고 책이나 읽는 것으로 소일을 하는 듯 했다.

 

"점심 때 고급 식당에 가면 죄다 여자라잖아.남자들 뼈 빠지게 일해서 번 돈으로

맛있는 거나 먹으러 다니고 난 당신이 그런 여자가 아니라서 좋아."

 

그때 아내가 기묘한 대답을 했었다.

"살고 싶은 의지가 있어야 남들이랑 밥도 먹고 수다도 떨 수 있는 거야."

 

 

"언니 안 왔는데 무슨 일 있어요?"

"아, 뭐 좀 물어보려는데 전화를 안 받아서, 다시 해볼께."

전화를 끊으려는데 처제가 다시 불러 세운다.

 

"형부, '빈 둥지 증후군' 이라고 들어보셨죠?

암이랑 우울증 같은 건 착한 여자들만 얕보고 찾아간다잖아요, 신경 좀 쓰세요."

말본새 하고는...저러니 여태 시집을 못가지..

 

딸에게 전화를 건다.

"아빠, 나 지금 엠티. 나중에 걸께."

아내는 어디로 간 것일까?

 

메모를 남겼나 싶어 다시 집안을 살폈다.

미술 전람회 티켓이 발견된 건 화장대 서랍 안이었다.

 

'마크 로스코'

스티브 잡스도 사랑한 화가라는데 잡스가 그림도 좋아했어던가?

도로 집어 넣으려다가 티켓 위에 휘갈겨 쓴 글씨가 보인다.

'레드, 피로 그린 그림.'

 

연애 시절에도 가본 적이 없는 미술관을 나이 오십에 갔다.

그것도 혼자서. 거대한 색 덩어리들, 달랑 '무제' 라고 적힌 사각의 그림들 앞에서 뻘쭘해진다.

대체 뭘 느끼라는 건지 떠밀리듯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간다.

 

해넘이 바다를 그린 양 온통 붉다.

화가가 동맥을 끊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란다.

자세히 보니 다 같은 빨강이 아니다.

크고 작은 색면이 서로를 밀쳐내듯 둥둥 떠다닌다.

레드, 아내가 좋아했던 색깔.온몸 던져 불사를 만한 무엇이 나타나면 죽어도 좋다며 농담처럼 말했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 균열이 생긴 건 언제부터일까. 팔짱을 끼어오는 아내의 손길이 싫어진 건 언제부터일까?

내 청을 거절한 적 없는 여자였다.

 

사업하는 형 위해 적금을 털 때도 형 대신 어머니를 모시자 했을 때도, 내가 잠시 한눈을 팔았을 때도...

"당신이 날 싫어할까 봐 두려워."

아내의 말은 진심이었을까?

 

 

 

아파트 담벼락에 기대어 1년 전 끊은 담배를 피워 문다.

아내 없는 집에 들어가기 무서워 서성거렸다.

멀리서 누군가 걸어온다.

 

달달달.짐 가방을 끓고 뒤뚱뒤뚱 다가 온다.

"당신, 여기서 뭐해?"

어둠 속 휘둥그레진 두 눈이 묻는다. 아내다. 기가 차 말문이 막힌다.

 

"어, 어떻게 된 거야?"

텅 빈 아파트에 혼자 있기 싫어 강원도로 귀농한 친구집에 다녀 온단다.

 

'문자 못 봤어?"

출장 중 잠결에 로밍폰이 휘파람 소릴 냈었던 기억이 나는 것 같다...

 

전화는 왜 안 받았냐고 묻자 첩첩산중이었다고 한다.

"은퇴하면 우리도 거기 가서 농사 짓고 살자. 천국이 따로 없어."

 

 

                                                                 

 

코흘리게 아이처럼 아내를 졸졸 따라가며 묻는다.

"로스콘지 로스코는 뭔데?"

"아~ 그사람? 옆집 여자가 표 한 장 남는다며 주길래....

무지 유명한 화가라는데 난 뭔소린지 도통 모르겠더라고."

 

이 여자를 그냥!

긴장과 두려움, 불안감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 강원도 된장으로 찌개 맛있게 끓여줄께."

거실에 불이 켜지고 가스레인지에 드르륵 불꽃이 인다.

집 안 모든 것이 살아 숨쉬기 시작한다.

아내가 돌아왔다.

사랑하는 나의 그녀가 돌아왔다.

 

조선일보 김윤덕 문화부 차장의  신줌마병법을 읽고...

 

 

 

 

일 전 일본의 여자들이 남편에 대한 복수로 은퇴후 바로 이혼을 청구한다는 뉴스를 욕을 하면서 봤었는데

혹 그녀도 남편의 은퇴만을 기다리는 건 아닐지... 

이젠 나도 헤어짐의 통렬한 복수에 적극적으로 한 표 찬성한다.

 

극심한 고통으로 오그라드는 듯 하던 심장이 금방이라도 멈출 것 처럼 알 수 없는 불안과 혼란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 했던 그토록 길고 캄캄하던 그 밤도 단 하루만에 날이 밝아지고

아내는 돌아와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이 아니라 그 무슨 일도 일으키지도 않았고 그럴 생각조차 없었던 것 같다.

 

저 아내의 말 없이 행해졌던 짧고도 긴 외출 후의 귀가가 맑은 명경지수 같이 보여진 것처럼

그때 내 아내의 일탈 후도 저러했더라면 땅바닥에 그대로 꿇어 앉아 나는 아내의 발에 입맞춤이라도 했을 것이다...

 

아내가 외출한 동안 저지른 일이 상상 외의 일탈이었던들 내가 알았거나 몰랐거나 

제발 속이거나 거짓말만은 하지 말았으면 하던 바램이 이루어졌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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