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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창고

목화

까미l노 2015. 2. 5. 10:43

목화는 민생을 상징하는 꽃이다. 목화가 의복을 만드는 원료이므로 백성들의 삶과 가장 밀접한 식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화의 일년 풍흉(豊凶)에 따라 백성들의 삶은 크나큰 영향을 받았다.


목화를 원료로 한 무명을 입은 우리 민족은 백의민족으로 불렸다. 목화가 들어오기 전까지 상류층은 명주나 모피를 입었고, 서민들은 삼베가 옷이었다. 그러나 무명을 입으면서 온 백성들이 혜택을 입게 되었다. 무명 옷감은 튼튼하고 땀을 잘 흡수하기 때문이다. 목화는 세계에 약 40여종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재배된 것은 아세아면이었다.

목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 문익점(文益漸)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목화를 원료로 한 무명은 그 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있었다. 이 점은 고려 충렬왕 22년(1296년)에 원나라 성종이 왕의 노복에게 목면 411필을 하사하였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목화가 들어오면서 의복 재료에 혁명이 일어나 고려말기의 시험단계를 거쳐 조선조를 들어와 재배가 권장되었다.

​목화는 노동요의 소재로도 많이 등장한다. 누에를 쳐서 명주를 자아내고 목화를 따서 목면을 생산하는 일은 모두 여성들의 몫이었다. 이때 여성들은 노래를 부르며 일의 고됨을 다소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삼베 대신 무명이 통화의 단위가 되었다. 무명을 기준으로 상품의 값어치를 평가한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세종대부터는 무명이 법적으로 통용되던 화폐인 국폐(國弊)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영조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를 간택할 때의 이야기이다. 임금님이 간택을 보는데, 다른 소녀들은 방석을 모두 깔고 앉았지만 김한구의 딸은 방석을 깔고 앉지 않고 서 있었다. 영조대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방석에 저의 부친의 성명이 쓰여 있기 때문에 앉을 수 없다고 했다. 영조가 다시 이 건물의 서까래가 몇 개인지를 물으니 다른 소녀들은 직접 세어보려고 떠들썩했지만 그 소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낙수물 떨어진 걸 보고 서까래의 숫자를 맞추었다. 임금이 다시 꽃 중에서 무슨 꽃이 제일 좋은가 하고 물으니, 소녀는 목화꽃이 가장 좋다고 했다. 그 까달은 목화꽃이 만백성이 옷을 해 입을 뿐만 아니라, 꽃이 두 번 피기 때문인데, 한번은 목화꽃이 피고 나중에는 목화꽃이 하얗게 되어 박과 같이 피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녀는 계속되는 질문에 고개 중에는 보리고개가 제일 높고, 새중에는 먹새가 제일 크다는 대답을 하여 왕비로 간택되었다. 그래서 영종대왕은 예순네살에 김한구의 딸에게 장가를 다시 들게 되었다.
목화는 지혜로운 왕비를 간택하는 설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예시 작품은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이야기로 되어 있으나 설화 각편에 따라서는 주인공이 명성왕후 민씨로 바뀌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목화가 만백성의 의복 재료이며 두 번의 꽃을 피운다고 한 것은 꽃이 지닌 실용성을 중시한 것이다.

목화가 백성들의 실용과 직결된다는 생각은 백성들의 고충을 알아야 하는 국모로서 필요한 덕목이었다.

무명이 신역(身役) 대신에 쓰인 예는 중종 38년(1543) 7월 21일 호조에서 다음과 같이 아뢴 말에서 알 수 있다. “평안도의 노비가 신공(身貢: 관노비 등이 신역의 대가로 내는 공물)으로 내는 면주(綿紬: 무명)는 나라에서 쓰는 것에 여유가 있으므로 지난해에 바친 면주를 쌀로 바꾸어 창고에 들였습니다.”
戶曹啓曰 “且平安道奴婢身貢綿紬, 以國用有裕, 故前年貢紬, 作米納倉
한편 조선시대에 무명은 공부(貢賦: 조세)로서 국가가 징수하였다. 중종 이후에는 보포(保布), 신포(身布), 군포(軍布)라 하여 신역(身役)대신에 무명으로 납입하는 법이 생겼던 것이다. 한편 무명은 무역품으로 일본으로 수출되기도 하였다

정월 대보름날 아침, 소에게 밥과 나물을 함께 차려 주어 소가 먹는 것을 보고 그해 농사의 풍년을 점치는 풍속이다. 전남에서는 여러 가지 음식을 갖추어 놓고 소가 어느 것을 먼저 먹느냐를 보는데, 이때 가장 먼저 먹는 것이 그해 풍년 든다고 여긴다. 고사리, 무나물을 비롯하여 밥과 함께 목화씨를 놓아 소가 먹도록 하는데, 목화씨를 먼저 먹으면 목화가 풍년이 들고, 밥이나 곡식을 먼저 먹으면 나락 풍년이 든다고 믿는다. 반면에 강원도에서는 밥보다 나물을 먼저 먹으면 논농사가 평년작이 될 조짐으로 여기기도 했다.

목화는 노동요의 소재로도 많이 등장한다. 누에를 쳐서 명주를 자아내고 목화를 따서 목면을 생산하는 일은 모두 여성들의 몫이었다. 이때 여성들은 노래를 부르며 일의 고됨을 다소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

목화꽃의 꽃송이를 따거나 어린 열매로 약술을 만들었다. 목화주의 재료는 목화열매 또는 꽃 600g, 소주 1.8ℓ이다. 꽃이 지고 2주 정도 지나면 목화열매가 맺히고 열매를 깨뜨려 보면 하얀 속살이 아주 맛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완숙되는데 솜이 되기 전 열매를 따다가 술을 담는다. 꽃으로 담글 때는 재료 2~3배의 독한 술을 붓고 열매로 담글 때는 3~4배 정도의 술을 붓는다. 이때 술은 독하고 맑은 술을 사용하면 좋다. 담근 술을 밀봉하여 냉암소에 3~4개월 보관한 후 음용한다.
목화주는 부인들의 혈액순환을 도와주며 젖이 부족한 산모가 먹으면 젖이 많아지고 신경통이 있는 사람에게 좋은 술이다. 그러나 여성이 배란기 때 취하도록 마시면 임신이 되지 않는다고 했으며, 남성이 먹게 되면 원기가 솟아나고 양기가 강해져 배고픈 줄 모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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