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무궁화 본문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많이 자라고 있다는 기록은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동양 최고의 지리서 산해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군자국은 우리나라, 훈화초는 무궁화를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무궁화를 훈화초, 목근, 순영, 순화, 조개모락화, 번리초 등으로 칭하였다. 이로 미루어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피기 시작한 것은 2천 년이 훨씬 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임을 알 수 있다. 지봉유설에 인용한 고금주에는 '군자지국 지방천리 다목근화'라 하여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많이 피는 것을 예찬하였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는 우리나라를 '근역' 또는 '근화향'이라 불러 왔다.
무궁화'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고려 중기의 기록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규모의 글 중에, 친구 두 사람이 근화를 일컬어 한 사람은 무궁'이 옳다 하고 또 한 사람은'무궁'이 옳다고 논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 무렵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무궁화', '무궁화', '무궁화' 등으로 쓰이다가 조선말경에 현재의 '무궁화'로 정착되었다.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예로부터 무궁화는 우리나라 고유의 다른 이름이 있었으며, 이 우리말에 유사한 한자음을 따서 사용해 오다가 뜻이 좋은 무궁화로 통일되어 쓰여진 것이라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화(오얏꽃)를 왕실화로 삼았으나 과거에 장원한 사람에게 임금이 내리는 어사화는 무궁화로 사용하였다.
또한 임금을 모신 가운데 베풀어지는 연회에 신하들이 사모에 무궁화를 꽂았는데, 이를 진찬화라 하였다.
무궁화는 이른 새벽에 꽃이 피었다가 오후가 되면서 오므라들기 시작하여 해질 무렵에는 꽃이 떨어진다. 이처럼 무궁화는 날마다 새로 피고반드시 그 날로 지고 만다. 그러나 매일 새로운 꽃이 연속적으로 피어, 초여름에서 가을까지 백여 일 동일 끊임없이 꽃을 피우는 것이 무궁화의 특징이다. 무궁화의 화기가 짧다거나, 위에서 말한 백낙천의 시 구절 등은 꽃 한 송이 한 송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지 나무의 화기를 말한 것은 아니다. 화기를 두고 볼 때에 가장 오랫동안 꽃을 피우는 것이 무궁화이다.
하루에 보통 작은 나무는 20여 송이, 큰 나무는 50여 송이의 꽃이 피므로 100여 일 동안 피운 꽃을 합하면 한 해에 2천에서 5천여 송이의 꽃을 피우는 셈이니 다른 화목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특유한 개화습성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이른 새벽 태양과 함께 피어나 태양과 함께 지는 무궁화. 그날의 태양은 졌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동녘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매일 새롭게 꽃을 피우는 무궁화. 무궁화는 태양과 일맥상통하는, 태양과 운명을 같이 하는 꽃이라 할 수 있다.
무궁화는 우리나라 꽃, 국화이다. 나라마다 그 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서 국화를 두고 있다. 국화가 정해지는 것은 법으로 공식화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깊은 관련을 가진 꽃이 자연스럽게 국화로 정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무궁화가 국화로 정해진 것은 법이나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면 수십, 수백 가지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 중에서 왜 하필이면 무궁화가 우리 민족에게 선택된 것일까? 옛날부터 선조들은 매, 난,국, 죽 사군자의 기품과 절개를 아껴 왔고 모란, 이화의 영화로움과 화려함을 즐겨 애송하였으며, 진달래, 봉숭아 등에 우리네의 정서를 담아 왔다.
이처럼 오랫동안 많은 사랑을 받아 시로 노래되고 그림으로 장식외어 온 여러 꽃들을 생각하면, 문득 역으로 무궁화가 왜 국화로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하여 우리는 별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무궁화가 국화로 굳어진 역사적 시점은 개화기로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화를 법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확실한 고증은 있을 수 없으나, 대체로 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문호개방 이후 서구문물이 유입되면서 서양 여러나라들이 그들 왕실의 문장, 훈장, 화폐 등에 사용한 국화를 접하게 되자, 어떤 이유로든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꽃으로 자리 잡고 있던 무궁화가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국화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무궁화는 민족의 상징이 되어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하여 왔다.
신라 때 최치원이 왕명으로 작성하여 당나라에 보낸 국서 가운데 “근화향(무궁화의 나라, 신라를 일컬음)은 겸양하고 자중하지만 호시국은 강폭함이 날로 더해간다”고 하였고, 구당서(737년: 성덕왕 36년) 신라전 기사에도 “신라가 보낸 국서에 그 나라를 일컬어 근화향, 곧 무궁화의 나라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여 보면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군자의 품격을 갖춘 나라, 무궁화가 아름답게 피는 나라'라 예찬하였으며, 또한 신라시대에 이미 무궁화가 우리나라를 일컫는 꽃으로 사용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고려, 조선시대에 와서도 스스로 근역, 근화향, 근원이라 하여 오늘날까지 '근역'은 무궁화가 많은 땅, 곧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일제는 무궁화가 태극기와 함께 민족지도자들에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민족과 조국을 상징하는 강력한 존재임을 간파하고, 무궁화를 우리 민족과 멀리 떼어놓기 위한 흉계를 꾸몄다. 그들은 무궁화를 볼품없는 지저분한 꽃이라 경멸하여 격하시켰으며, 어린 학생들에게 '무궁화를 보면 눈병이 난다'느니 심지어 '눈이 먼다'고 까지 하여 멀리 피하여 가도록 가르쳤다.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국화말살정책을 강행, 무궁화를 심지 못함은 물론 심어진 무궁화를 모두 캐내도록 하고 무궁화를 캐어낸 자리에는 사꾸라를 심도록 하였다. 이는 우리 민족의 혼을 뿌리채 말살하고 일본인화하겠다는 그들의 식민지정책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민족교육자이며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남궁 억(南宮檍)은 민족정신 앙양을 목적으로 전국적으로 무궁화심기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자신이 설립한 강원도 홍천의 모곡학교(牟谷學校) 학생실습지에 무궁화 묘목을 재배하여 전국 각지에 보내어 무궁화심기운동을 벌였다.
1933년 일제는 남궁 억의 이와 같은 사업이 불온사상을 고취하고 치란을 교란시킨다 하여 이른바 '무궁화사건'이란 이름으로 모곡학교 교직원과 교회목사, 그리고 친척들까지 모두 체포하고 무궁화 묘목 8만주를 불태워버렸다.
이 무궁화사건 취조 중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비밀결사 십자당(十字黨)이 발각됨으로써 사건이 확대되고 수많은 인사들이 구속되었다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슬픔에 젖었네.
무궁화 이 강산이 이젠 침몰되어 버렸네.
국권이 상실되던 해 9월 애국지사 황현(1855 1910년)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남겼다.
또한 김좌진 장군은 '삼천리 무궁화 땅에 왜놈이 웬일인가'라고 부르짖으며 조국광복을 애타게 기원하였다. 이 땅의 여인들은 우리나라의 지도 위에 8도를 상징하는 여덟 송이의 무궁화를 수놓으며 광복의 그 날까지 민족정신을 심어 나갔다. 특히 남궁억은 무궁화를 통해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확산시키고자 '무궁화동산꾸미기'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지훈은, “희디흰 바탕은 이 나라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씨요, 안으로 들어갈수록 연연히 붉게 물들어, 마침내 그 한복판에서 자주빛으로 활짝 불타는 이 꽃은 이 나라 사람이 그리워하는 삶”이라 하였다.
무궁화는 화려하거나 요염하지 않고 짙은 향기도 없다. 여성적이기보다는 중성적인 꽃이다. 품종에 따라 여러 가지 색깔이 있지만,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것으로 흰색의 꽃잎에 화심 깊숙이 붉은색이 자리 잡은 단심 무궁화가 손꼽히고 있다. 그 깨끗한 흰 꽃잎과 깊숙이 또렷하게 자리 잡은 붉은색 심문은, 가슴 속에 열정을 간직한 순결한 영혼을 연상하게 한다.
마치 먼 옛날 심신유곡을 찾아다니며 영혼을 맑게 하고 가슴의 뜻을 가지던 화랑도의 무리처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달빛 아래서 손에 손을 잡고 긴 댕기를 휘날리며 끝없이 강강수월래를 하던 이 땅의 순결한 처녀들인 듯...
옛날 어느 나라에 뛰어난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곱고 글과 노래를 잘하여 많은 남자들이 사랑을 구애하여 왔다. 그러나 여인에게는 앞을 못 보는 남편이 있었고 그녀는 남편을 극진히 사랑하였으므로, 아무리 재산이 많고 권세가 높은 사람이 유혹을 해도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여인을 탐내 오던 고을의 성주는 여러 차례의 간청에도 그녀의 마음이 조금도 동요되지 않음을 보고 강제로 여인을 잡아들였다. 그러나 끝까지 명령에 굴하지 않자 성급한 성주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여인의 목을 자르고 말았다. 여인은 죽으면서 자신의 시체를 집 뜰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여, 소경 남편이 있는 집 뜰에 묻어 주었다.
묻은 자리에서 싹이 돋고 꽃이 피었는데, 이 꽃은 삽시간에 그 집 뜰 안을 둘러싸고 말았다. 마치 남편을 보호하여 품안에 감싸 안은 울타리처럼.
그 뒤 동네 사람들은 이 꽃을 ‘번리화(무궁화의 별칭)’, 즉 ‘울타리꽃’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