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시와 섹스 본문
시와 섹스
김용오
나에게 있어서의 시는
본능적으로 즐기는 섹스와 동일하다.
정갈한 저녁상을 물려놓고
감미로운 서정의 음악을 들으면
조금씩 발기하는 나의 남성.
햇빛을 물고 빤짝거리는 나무들의 잎새나
빗물에 씻긴 푸른 산빛의 황홀을
한순간 따뜻한 어둠 속에 엎드려 맛보는
알몸의 정사
나에게 있어서의 섹스는
정신적으로 즐기는 시와 동일하다.
질척거리는 일상의 골목길을
잠시 잊어버리고
조용히 앉아서 마시는 한잔의 블랙커피,
수도하는 선승처럼
불켜진 한밤의 집중의 침실에서
꼭 다문 침묵의 혀를 빨면
조금씩 밝아오는 영혼.
온몸을 끌어안고 뒤척이는 여자들의 신음소리나
부르르 흐느끼는 허벅지의 짜릿함을
한순간, 하얀 종이 위에 엎드려 느껴보는
언어의 정사
나에게 있어서 시와 섹스는
서로 두 손 잡고
한 몸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 같다.
어둠속에서
김용오
지난 주중에 공안과에서 눈수술을 하였습니다
아예 두 눈을 질끈 감고 한 열흘 깜깜한 어둠속에서 지냈습니다
이상한 것은 땅바닥에 떨어져 누워 있는 낙엽들이 부서질까봐
뒷발을 쳐들고 살금살금 지나가는 바람의 발자국 소리가 보이고
정처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생각들이 집으로 돌아와서는
갑자기 뛰는 것도 우는 것도 다 잊어버린 청개구리가 되어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며 조용히 앉아서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풍랑이 없는 잔잔한 바다로 누워 지냈습니다
밤에는 깨소금 같은 하늘의 별들까지 우르르 몰려나와
하얀 이빨을 드러내놓고 빤짝빤짝 웃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아도 전혀 갈증이 없는 나날이었습니다
뮤즈에게
김용오
저는 이렇게 들었어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 속에 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끝내 간절한 마음 하나 보여주지 못한 채
떠나가는 이의 뒷모습을 바보처럼 바라보는
안타까운 눈빛 속에 물처럼 고여 있다는 것을요
어느 날 시끄러운 세상이 싫다면서
스스로 꽁꽁 막아버린 두 귀를 통하여
저는 이렇게 들었어요, 누군가가
길가에서 장대처럼 내리는 비를 맞고 있을 때
넓은 우산을 들고 천천히 빨리 다가가서
그 비를 막아주는 데에 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말없이 우두커니 서서
그 비를 함께 맞는 데에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늘 무심하게 조용한 무한 허공으로부터
저는 또 이렇게 들었어요, 우리들 모두가
많이 익숙해진 데에 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낯선 곳으로
훌쩍 떠나는 여행의 자유 속에 있다는 것을요
언제나 너무 소리가 커서 들리지를 않는
바위 같은 침묵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요
결국은 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끝내 하지 않는 데에 있다는 것을요
이덕무
김용오
만약 세상을 살다가 자기를 알아주는 귀한 벗을 얻는다면 그는 마을 앞 넓은 밭에 나가 10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1년 동안 누에를 길러 손수 오색실을 물들일 거라고 써 놓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따
뜻한 봄볕에 내어놓고 잘 말려서는 볼이 붉은 아내로 하여금 백 번 달군 금침 바늘로 눈웃음이 고
운벗의 얼굴을 수놓게 한 다음 그것을 등에 지고 밖으로 나가 뾰족하고 험준한 높은 산과 세차게
흐르는 물이 흐르는 곳, 그 사이에다 펼쳐놓고는 오랫동안 마음으로 바라보며 서 있다가 저녁 해가
설핏 저물 때쯤이면 소리 안 나게 접어 품에 안고는 천천히 산길을 걸어서 내려오리라고 그의「잡
된 글쓰기」속에다 써 놓았다, 뉘엿뉘엿 집으로 돌아오리라고 써 놓았다
관세음보살에 대하여
김용오
한 번은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두 팔로 가만히 껴안으며 빤히 올려다 보았더니 글쎄, 아침저녁 배가
고파 울었던 까까머리 어린 시절 박꽃 같은 앞가슴을 풀어 불쑥 입안에다 넣어주던 엄마의 까만 젖꼭
지의 비릿한 냄새가 나는 거 있지 그리고 나서 몇 십년이 덧없이 흐른 뒤 한번 더 다시 찾아가서는 그
저 먼데 숨어서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살짝살짝 훔쳐만 보고 있었더니 글쎄, 이 풍진 세상 이미 오
래전에 구겨지고 때 묻고 멍이 든 너의 마음 내 다 보고 있었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설렁설렁 바람
처럼 걸어와서는 몇 번이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말없이 돌아서던 그 인자한 손이 한참동안 허공에
떠 있는 거 있지 한참동안 허공에 젖은 향기로 떠 있다가 사라지는 거 있지
음악,La Vita E Bella)/Nicola Piov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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