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처녀치마 본문
봄이 오면 나도 모르게 ‘봄처녀’를 흥얼거리며 마음이 설렌다.
‘봄 처녀 제~오시네 ~ 새풀옷을 입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중년의 남자에게 꽃다발 안고 올 얼빠진 처녀는 없을 것이니,
산과 들에 피는 봄꽃이 봄처녀려니하고 위안을 삼는다.
봄꽃 중에서는 이름으로 보나 모양으로 보나
‘처녀치마’가 봄처녀를 가장 많이 닮았다.
그런데 치마면 치마지 왜 '처녀치마'라고 했을까?
어떤 분은 일본의 식물명을 잘 못 번역한 것이라고 하지만
몇몇 자료를 찾아보니 그리 가볍게 말할 일이 아닌 듯하다.
우리나라 식물의 국명은 1937년에 조선박물연구회가 펴낸
조선식물향명집이 그 효시로, 故 정태현박사가 이를 주도했다.
그 분의 말에 따르면 그 무렵은 조선어학회사건이 있었던 직후로서,
조선말 식물명을 왜 만드느냐는 총독부의 제지가 있었는데,
학자들은 일본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일본식물명을 번역하는 것이라고 둘러대어 화를 모면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우리의 식물명이 일본 이름을 번역한 것이 많아졌고
처녀치마도 그러한 과정에서 생긴 이름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식물의 日名 ‘しょう-じょうばかま’(쇼우죠우바카마)는
‘처녀치마’가 아니라 ‘성성이바지’라는 뜻이다.
‘성성이’는 오랑우탄이고, 술을 좋아해서 얼굴이 붉다는 상상의 동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はかま’(하카마)는 일본의 전통 복식인 통 넓은 바지로,
우리나라에서 한 때 유행했던 치마바지나 검도복 하의 같은 옷이다.
일본에서는 이 식물의 붉은 꽃이 성성이의 술 취한 듯한 얼굴을,
잎은 하카마를 닮아서 ‘성성이의 하카마’라고 부르는 것 같다.
학자들이 일본어를 정말 몰라서 처녀치마로 번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말로 성성이는 しょう-じょう(쇼우죠우), 처녀는 しょ-じょ(쇼-죠)다.
빨리 말하면 발음이 거의 비슷하니까,
당시의 우리나라 학자들은 짐짓 일본어에 미숙한 채 하면서
우리나라에 없는 성성이나 일본의 옷인 하카마를 직역하지 않고
우리 고유의 정서에 맞도록 ‘처녀치마’로 이름 붙였지 싶다.
좀 생뚱맞은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생각도 들었다.
지금도 우리가 즐겨 부르는 ‘봄처녀’가 1932년에 발표되었으니,
학자들이 조선식물향명집을 준비하던 시기에 많이 불렸을 것이고,
‘진주 이슬 신으시고 꽃다발 가슴에 안고 오는 봄처녀’는
그토록 갈망하던 광복을 은유하고 있으리라는 추측이다.
그렇다면 식물학자들도 봄처녀 노래를 부르면서 은연중에
처녀치마의 이름에다 광복의 꿈을 감추어두지 않았을까 ...
우리 꽃 이름이 일본식 이름이니, 잘못 번역된 것이니 쉽게 말들 하지만
처녀치마의 이름을 보면 그 시대 지식인들의 고뇌가 엿보인다.
인디카 사진 동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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