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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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의 벤치

이제 너를 놓으려 한다

까미l노 2012. 3. 13. 15:06

 

이제 너를 놓으려 한다


이제 너를 놓으려 한다
태풍이 오려는지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불던 간밤엔
기도하는 이처럼 골방에 앉아 내내 생각했다

이전에도 없었던 감정의 사치 그 외에 무엇이 더 있다고
늘 가슴이 젖어 햇살이 쨍한 날에도 코끝이 찡하고
고운 하늘빛 수면 위로 여울지는 물 그림자 위를
냉랭하게 쓸고 가는 가을바람처럼
앓는 소리로 울던 쓸쓸한 날들

이제 너로부터 돌아서려 한다

너는 절벽이다
너는 애초부터 바다 한가운데 아름답게 떠있는 절벽의 섬
네 안에서 종종 절벽을 만날 때마다
네 속에 있는 또 다른 길들을 찾았지만
끝내 이르는 곳은 어쩔 수 없는 절벽이었다

난 아찔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투신하지 않으련다

네가 만약 동산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 열매 한 입만 베어 물게 했더라면
아니 아니, 목마름에 견딜 수 없어 하던 내게
네 가슴 한쪽을 열어
시원하고 단물 한 모금만 마시게 했던들
나는 너에게로 가 기꺼이 투신했으리라

태풍 주의보라도 쏟아 놓으려는지
여전히 불안한 바람이 속이 뒤집힌 채 미친 듯이 내 달리는 아침
너에게로 열려 덜컹거리던 마음의 문
성급히 빗장을 걸고 단단히 못질을 하여 폐쇄하였다

이제는 네게로 드나들던 길 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해지고 여린 잡목들 뿌리를 내려
길이었던 흔적마저도 가늠해 볼 수 없는 날들 올 것이다
아직은 문틈 사이로 드나드는 바람까지야 어쩌겠느냐마는
행여 본체하지 마라
나는 이렇게, 너에게 안녕을 고하는 일로 오늘 아침 분주했다.
 
- 송해월-



음악, Oblivion(망각) / Pablo Zieg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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