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간이역, 시간이 멈췄다… 그리움이 쏟아졌다 본문
심천역엔 하루 7번 기차가 선다.
기차가 워낙 드문드문 지나는 때문일까. 풀 한 포기가 철길 사이로 당차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작은 간이역에 생기를 불어넣는 데는 조그마한 잡초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심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지프내(심천·深川)'에 기차가 섰다.
봇짐을 싸안은 할머니, 중절모로 한껏 멋을 낸 할아버지, 새침한 미소의 단발머리 소녀.
각기 다른 사연을 담고 도시에 다녀오는 길이다. 철길 사이로 고개를 내민 풀 한 포기가 돌아온 이들을 조용히 반긴다.
단출한 개찰구를 빠져나오자 시곗바늘이 거꾸로 돌아간다.
순식간에 발밑이 흑백사진으로 변하는 듯싶다.
도시가 현재라면 이곳은 과거. 충북 영동군 심천면은 30여 년 전, 1970년대의 풍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기차는 이따금씩 사람들을 '현재'로 싣고 갔다가 다시 '과거' 속으로 토해 놓는다.
타임머신이라도 된 듯이. '시간여행'을 마친 사람들은 지난 100여 년을 한결같이 서 있는 기차역에서 안도감을 찾는다.
부모의 아늑한 품으로 돌아온 아이처럼.
고희(古稀)의 여류시인 문육자 씨는 두 번째 수필집 '끝나는 길에서 다시 떠나며'에서 심천역을 이렇게 노래했다.
'간이역! 열차가 몇 안 되는 사람들을 잠깐 내려주고는 무심히 떠나가는 곳. 그러기에 그리움과 기다림이 남아 있는 곳이다.'
○ 기차역은 마을과 함께 숨쉰다
심천역은 1905년 1월 경부선 개통과 동시에 문을 열었다.
1934년에 세워진 현재의 역 건물(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297호)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23개 간이역사 중 하나다.
심천면은 일제강점기 이후 철도 이용객이 늘어나면서 크게 번성했지만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서울∼부산)와 국도 4호선(전북 군산∼경북 경주)이 잇달아 개통하면서 철도와 함께 쇠락의 길을 걸었다.
심천역은 1905년 문을 열었지만 현재 역사 건물은 1934년에 세워진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이 건물은 등록문화재 297호다. 심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번(상행 3번, 하행 4번) 선다. 하루 이용객은 승하차를 합쳐 50명 안팎.
심천을 찾은 지난달 중순엔 연이은 빗줄기에 금강이 한껏 불어나 있었다.
텅 빈 심천역 광장에 빨간 승용차 한 대가 눈에 띈다.
▼ 역광장 한쪽 참깨 더미엔 역장과 농부의 넉넉한 마음이… ▼
인근 용산면에서 고추농사를 짓는 신신자 씨(69·여)의 차다.
집까지 가는 시내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꼴로 있어 낡은 승용차가 얼마나 요긴한지 모른다.
10년 전 귀농한 신 씨는 틈만 나면 대전 큰아들네를 찾는다. 전날도 "뭣 하러 또 가느냐"는 남편의 타박을 못 들은 체했다.
밑반찬은 핑계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주들을 한 번이라도 더 보겠다는 마음에서다. 그런 신 씨에게 심천역은 늘 정겨운 곳이다.
이경원(15), 강유림 양(15) 등 두 여중생은 아침 첫차를 타고 대전까지 가 조조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3년간 같은 반에서 공부한(심천중학교는 한 학년에 1개 반뿐이다)
둘도 없는 친구. 심천역을 통해 다녀오는 반나절의 영화여행은 둘에게 가장 설레는 일이다.
"'최종병기 활'을 봤는데, 정말 재밌었어요. 근데 생각보다 늦게 끝나서 기차를 놓치는 줄 알았어요.
다음 기차는 세 시가 넘어야 있는데…. 꼼짝없이 대전역에서 몇 시간 기다릴 뻔했죠."
대전역에서의 뜀박질이 힘에 부쳤는지 두 소녀의 얼굴은 여전히 상기된 채였다.
이날 오전 11시 45분 부산행 무궁화호에서 내린 사람은 모두 8명이었다.
그중엔 잠깐 넋을 놓았다가 바로 전 역인 옥천에서 내리지 못한 할머니도 있었다.
옥천으로 가려면 8시간은 기다려야 하니 적잖이 당황스러울 터. 그런데 오탁균 심천역장(50)에겐 꽤나 익숙한 상황인 듯 보였다.
"할머니, 조금만 계시면 서울행 열차가 도착하니까 그걸 타고 일단 대전까지 가세요.
거기선 옥천 서는 기차가 자주 오니까 제일 빠른 걸로 타시면 돼요. 아셨죠?"
심천역엔 이런 일이 잦다. 심지어 안내방송 중 '심'천역을 '김'천역으로 착각하고 서둘러 내렸다 낭패를 보는 승객도 적지 않다.
오죽하면 심천역엔 심천 사람보다 잘못 내린 사람이 더 많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까.
대전이나 영동에서 출퇴근하는 역무원들이 길 잃은 승객들을 목적지까지 태워주는 경우도 허다하다.
심천역엔 사람 냄새가 짙다.
기차역은 이곳 사람들에게 마을회관이나 오래된 학교 운동장이나 마찬가지다.
올봄에도 심천면민 단합 체육대회가 역 광장에서 열렸다.
주변에서 가장 넓은 장소이기도 하지만 100년이 넘도록 생사고락을 같이한 기차역만큼 지역 주민들에게 친근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
휑한 역 광장 한쪽에 참깨 수백 단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비어 있는 공간이라지만 공공시설인 철도역 마당에 참깨라니. 오 역장도 머쓱해한다.
"한 어르신이 참깨를 널어놓고는 며칠만 좀 봐 달라더군요.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하기도 뭣하고,
다 사람 사는 덴데 참깨 말리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하고요. 허허허."
○ 과거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난계 박연 선생의 고향인 심천에는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성하다. 왼쪽부터 오탁균 심천역장, 역 광장에서 말리고 있는 참깨, |
심천은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인근에서 가장 큰 장이 섰던 곳이다.
기차로 들고 나는 사람이 많다 보니 역 광장 주변에도 상점과 식당이 즐비했다.
그러나 지금은 역 맞은편의 '초강약방'과 '형제상회' 등 몇몇 곳만 문을 열어두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초강약방 주인 박래섭 씨(70)는 이곳에 터를 잡은 지 47년째다.
인근에 보건소가 생긴 뒤에는 직접 조제를 하지 않고 약을 팔기만 했다. 요즘은 드링크제를 사려는 주민들만 가끔씩 약방을 찾을 뿐이다.
"이래봬도 이 약방으로 아들 셋을 다 박사, 회계사로 키웠어. 예전에는 정말 약을 갖다놓기가 바쁘게 동났었는데…."
코레일 윤성원 과장(40)의 말을 들어보면 불과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이렇게 썰렁하진 않았나 보다.
"2005년일 겁니다. 여기서 근무하다 다른 역으로 발령이 나서 송별회를 했는데, 초
강약방 바로 옆에 삼겹살 집이 있었어요. 작년에 다시 와보니까 그 집하고 중국집, 다방 같은 데가 죄다 없어졌더라고요."
윤 과장이 가리킨 곳에는 허물어지기 직전의 낮은 담벼락 앞에 비료 수백 포대가 쌓여 있다.
그의 '증언'이 없었다면 시끌벅적하던 식당 자리라고 누가 짐작조차 할 수 있었을까.
인근의 심천2리 마을회관에서 만난 이상임(87·여), 진상녀 씨(86·여)도 옛 시절을 또렷이 추억해 냈다.
지금은 심천 사람들이 파, 고추, 배추 따위를 대전역 앞 시장에 내다 팔지만, 예전엔 인근 지역 사람들이 모두 심천으로 몰려 왔었단다.
"그때는 장날뿐 아니었어. 요 앞 금강에 서울, 부산에서도 사람들이 와서 멱을 감았지.
특히 9월에는 금강 올뱅이(다슬기의 충북 방언·올갱이라고도 함)가 약이 된다고 해서 사람들이 무지허니 왔었어.
올뱅이를 박박 씻은 다음에 까서 물에 넣고 끓이다가
부추랑 아욱이랑 파, 마늘, 고추 넣고 된장 간을 하면 얼쿠룸하니 얼마나 맛있는지 몰러."(이상임 씨)
조용한 동네에 뜬금없이 출현한 낯선 도시인에게 이곳 사람들은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최구환 씨(62)는 형제상회에서 소주 한 병과 안줏거리 몇 개를 사들고 나오더니 기어이 기자를 평상에 주저앉혔다.
역전 이발소 앞에서 담소를 나누던 유청광 씨(68)와 유영춘(64), 한병무 씨(55)도 자연스레 자리를 잡았다.
그 후론 소주 한 잔에 심천 우(牛)시장 얘기 한 대목, 안주 한 입에 도시로 나간 아들 얘기 한 대목을 얹는 식이다.
"5일장이 서믄 사람들이 그냥 여기서부터 저까지 꽉 들어찼었어. 사람 찾아 댕기다가 한나절이 다 갔지.
우시장도 굉장했어. 안 그랴요 형님?"(최구환 씨)
"그라믄. 백중(百中·음력 7월 15일) 땐 역 광장서 씨름판도 벌어졌지
아마. 우리 젊었을 때는 이 근방에 사람이 빡빡혔어."(유청광 씨)
아마 삼십 년은 족히 똑같은 얘기를 하며 술잔을 돌렸을 터다. 그래도 한마디 한마디에 흥이 담겼고, 진지함이 묻어났다.
정치 얘기로 흘러가도 이 동네는 여전히 박정희, 육영수 타령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국도 4호선 건설 당시 심천 사람들이 농지 수용에 반대하면서 발전 기회를 놓쳤다느니,
주민 반대가 아니라 자신들이 모르는 정치적 이유가 있을 거라느니 하면서 말이다.
박정희 이후 대통령이 7번이나 바뀌었지만, 그들에겐 관심 밖인 듯했다.
술잔은 어둑어둑한 저녁 무렵까지 돌고 또 돌았다.
"꼭 내 큰아들 같어. 열심히 살아서 부자 되고 그라믄 돼. 아무튼 복합적으로 잘햐."
오후 6시가 넘어 기차 한 대가 도착했다. 이날 심천에 선 다섯 번째 기차다.
김진 씨(57·여)는 대전에 사는 친정어머니와 온천을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김 씨가 미숫가루 한 잔만 대접한 게 아쉬웠는지 직접 만든 오미자 잼과 감잎차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지난해 2월 우연히 만난 시인에게는 식사도 대접했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낯선 이방인에게 불쑥 건넨 덕담 한마디, 차 한 잔이 심천의 향기를 더 진하게 만든다.
○ '지프내'의 부활을 꿈꾸다
심천은 금강 상류와 송천강이 합쳐져 '깊은 내'를 이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사람들은 예전부터 불리던 '지프내'란 이름을 더 좋아한다.
물이 좋고 산세가 좋아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곳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들여온 부사(富士·후지사과)의 국내 첫 재배지이기도 한 심천은 사과뿐 아니라 포도와 복숭아로도 유명하다.
마을 사람들이 기억하는 대로 철도는 심천의 발전을 이끈 일등공신이었다.
그러나 도로가 주요 교통수단으로 떠오르면서 철도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심천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철길 때문에 개발계획조차 세울 수 없었던 것.
인구도 계속 줄어 지난달에는 처음으로 3600명을 밑돌게 됐다. 서정길 심천면장(55)은
"2005년 말 3900명 정도였던 인구가 6년 새 7∼8%나 줄었다"며 "최근 두 분은 돌아가시고,
열 분이 이사 가시는 통에 3597명(8월 12일 기준)이 됐다"고 전했다.
워낙에 주민 수가 적다 보니 면장이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사항까지 꿰고 있을 정도다.
요즘 심천에선 기차역과 철도를 다시 한 번 지역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 옛 영화를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심천면은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 중 한 명인 난계 박연 선생(1378∼1458)의 생가가 있는 곳.
영동군은 2006년 심천면 고당리에 '난계국악기체험전수관'을 만든 데 이어
2014년까지 200여억 원을 들여 국악 명창이나 국악기 명인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국악체험촌을 건립한다.
심천면은 '국악의 고장'이라는 지역 브랜드를 알림과 동시에 심천역 주변의 면소재지 정비사업을 추진함으로써 시너지를 얻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심천면과 심천역이 함께 마련한 '심천역 스토리텔링사업 방안 검토(안)'에는 △역사 및 주변 정비사업
△'국악역'으로의 역명 변경 또는 부기 추진 △심천역∼금강수변공원∼난계국악촌 둘레길 조성 등의 다양한 계획이 포함돼 있다.
관련 예산이 올해 확정되면 내년부터 곧바로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서 면장은 "철길이 효자 노릇을 하다 언제부터인가 불효자가 됐다"며 "심천역을 잘 살리면 다시 철도가 심천의 효자가 될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오후 8시 무렵 저 멀리서 서울행 막차가 굉음을 내며 도착을 예고한다.
여름밤을 헤쳐 온 열차의 불빛은 가까워질수록 역을 밝힌 가로등 불빛과 묘한 어우러짐을 연출한다.
일흔을 바라보는 촌로는 "다시 올게"라는 손녀딸을 배웅하며 연신 손을 흔들어댄다.
간이역은 오늘도 사람을 만나고, 또 사람과 헤어진다. 연착된 오 분을 만회하려는 듯 기차가 서둘러 걸음을 재촉한다.
타임머신을 떠나보낸 심천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김보경 인턴기자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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