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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엔 까미노

잊혀진 옛길 흙길 #12

까미l노 2007. 11. 23. 22:57

송광사-선암사 (굴목이재)

 

 

조계산에 둥지를 튼 고찰 선암사와 송광사.

이 두 절을 잇는 산길은 산림욕을 하며 걷기 좋다.

 

굴목이재를 넘어가는 녹녹지 않은 산길이지만 고갯마루에 다리쉼할 주막이 있다.

고개에 얽힌 사연도 발길을 더디게 한다.

산길 20리는 그렇게 녹음에 젖어 이야기에 취해 걷는 길이다.

 

선암사는 ‘꽃을 길어내는 절’이다. 철쭉은 녹음 속에 불을 밝혔고,

대웅보전 뒤꼍에는 불심처럼 빨갛게 영산홍이 물들었다.

수국은 선방 담장에 기대어 연둣빛 꽃망울을 수북하게 터뜨려 ’꽃절’, 오월의 선암사를 빛나게 한다.

 

햇차를 덖는 구수한 냄새를 뒤로하고 굴목이재로 향한다.

선암사를 벗어나는 길에 봄빛이 길바닥을 수놓았다.

아름드리 왕벚꽃나무에서 떨어진 벚꽃이 길에 수북하다.

 

연분홍빛으로 물든 꽃길을 즈려밟고 지나는 걸음이 새삼 조심스럽기만 하다.

그곳에서 다리를 건너 두어 걸음이면 굴목이재를 향한 산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마에 땀이 맺히기도 전에 발길을 멈추게 된다.

 

‘활엽수의 바다’라는 조계산에 보석처럼 박힌 편백나무 군락이 ‘게 섯거라’ 외치기 때문이다.

선암사의 편백나무는 수령 60∼70년 된 것들이다.

한아름씩 되는 녀석들이 곧장 수직으로 솟구친 모습이 장관이다.

 

그 깊은 편백나무 숲에 노란 꽃을 틔운 피나물이 불길처럼 번지고 있다.

어둑어둑한 숲이 꽃 덕분에 등불을 밝힌 것처럼 환하다. 어찌 발길을 쉽게 옮길 수 있을까.

조계산(884m)은 아늑한 품을 가진 육산이다.

 

선암사∼굴목이재∼송광사로 이어진 산길은 8.7㎞로 3시간30분쯤 걸린다.

선암사나 송광사, 어느 쪽을 들머리로 잡아도 상관은 없지만 선암사에서 출발하는 게 조금 쉽다.

또 선암사쪽이 산길을 오르며 볼 것도 많다. 샛길이 많지만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물과 밥은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경부와 천안∼논산,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한다. 승주IC로 나오면 선암사까지는 15분 거리다.

 

경부와 대전∼진주, 남해,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도 시간은 얼추 비슷하다.

산행을 마치고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돌아갈 때는 버스편을 이용해야 한다.

송광사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순천행 버스를 타고 와 승주읍에 내린다.

 

승주읍에서 선암사까지는 시내버스가 자주 있다.

편백나무 군락을 지나면 등산로는 제법 산길다워진다.

그 산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옛사람을 떠올려본다.

 

이 길을 따라 선암사와 송광사의 스님들이 오가며 우정을 나눴을 것이고,

승주의 처녀는 꽃가마 타고 낙안읍성으로 시집을 갔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도 이곳 조계산이다.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었던 해방 후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이 산을 무대로 드라마틱하게 펼쳐졌다.

숯가마 터를 지나면서 계류 흐르는 소리는 저만치 멀어진다.

고갯마루가 가까워졌다는 증거다. 이곳부터 가파른 돌계단이 시작된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무심코 발길을 내딛은 사람들은 ‘아차’ 싶은 곳이다.

 

그러나 힘들어만 할 일도 아니다. 심장이 터질 듯이 숨이 차면 잠시 고단한 발길을 멈춘다.

뒤를 돌아보면 눈높이에 맞춰 펼쳐진 초록 바다가 타는 속을 씻어준다.

굴목이재에 오르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이제 코가 땅에 닿을 듯이 가파른 오르막은 없다. 사실 굴목이재는 두 개다.

선암사에서 오르는 길의 고갯마루는 선암굴목이재라 부르고,

송광사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고갯마루는 송광굴목이재라 부른다.

 

선암굴목이재에서 마음이 급해진다.

선암굴목이재와 송광굴목이재 사이에 자리한 맴사골 보리밥집의 구수한 밥 냄새 때문이다.

다리 하나를 건너면 사람들이 주막집이라 부르는 보리밥집이 있다.

 

20년 전부터 자리를 지켜온 이 집의 보리밥은 미식가들에게도 이미 이름이 났다.

굴목이재를 넘겠다고 나선 사람들 가운데는 이 집의 보리밥을 목표로 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다시 게으른 발걸음을 송광굴목이재로 옮긴다.

주막집에서 든든하게 속을 채운 탓에 발길이 굼뜨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철쭉 숲을 지나면 송광굴목이재다.

 

이제부터 송광사까지는 줄곧 내리막이다.

하산길은 조금 지루하다. 40분쯤 내려가면 시원한 계곡 물 소리가 마중을 나온다.

계곡에 걸린 다리 세 개를 지나면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보 사찰의 하나로 불리는 송광사다.

 

송광사로 들어가는 다리이자 정자인 우화각에 걸터앉아 다리쉼을 한다.

그림처럼 잔잔한 물 위로 하늘이 가득 들어앉았다.

싱그러운 5월의 숲에서 반나절을 보낸 행복이 물 위로 물감처럼 번진다.

 









조계산 보리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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