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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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은지심

남자가 울 때

까미l노 2014. 9. 3. 22:09

 

가운데 노장역을 맡은 이가 내 친구 58 개 거튼 얼~쑤 라는 넘이다

 

봄이 다 가던 그 날 햇살은 외려 따스했지만...

지금 너무나 행복하게 살고 있어도 전혀 샘조차 나지 않을 그런 고마움이 드는 사람..아니 친구가 있습니다.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요즘에야 흉은 커녕 드러내고 자랑까지(?)하는 상팔자(?)라고도 하는데

그 때만 해도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고 실패한 사람들마냥 숨기기도 했던 시절이었지요...그리 오래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지만...

 

아직도 독수리 타법에다 화면을 쳐다 보면서 키보드를 만지지 못하기도 하지만

속도 빠른 컴퓨터가 막 보급될 무렵이었고 시골 촌놈이었던 나는

컴퓨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회사일조차 아가씨에게 다 맡기는 과학 문명이기...뭐 이따위 것들은 극도로 싫어하던 타입이었습니다.

 

그런데 혼자가 되고서 우연히 그야말로 신문을 읽다가 본 기사 가운데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터넷 모임 이야기를 보게 되고 그날 즉시 서울로 발걸음을 하게 됐었는데

58년 개띠들의 특성인지 그와 나는 달리 말이 필요없이 서로를 미루어 다 짐작하게 되는 그런 친구가 되었지요,

 

종종 시골서 올라오는 내게 그 친구는 혼자 사는 아차산역 주변의 자그 마한 자신의 집으로 나를 초대하고는 했습니다.

그도 나처럼 혼자 사는 홀애비였는데 저 자신만큼이나 엄청 덩치 큰  백구 진돗개 두마리랑 살고 있었지요,

우리들과는 달리 그 두녀석들은 부부였는데 금슬이 말 할 수 없이 좋았었고 내가 가면 그 큰 덩치들로 내 품에 안기곤 하던 녀석들이었습니다.

 

단독 주택인지라 집안이 추워 조개탄 난로를 마루에 두고 살았는데 

그 난로는 아무거나 닥치는대로 집어넣고 불장난하면 참 재미있고 괜시리 마음까지 훈훈해지는 그런 멋이 있었지요,

 

전통 문화에 관심이 많고 탈춤을 하는 사람이라 집에는 우리 옛것들이 참 많았고

민족 사진 작가협회의 전통춤 사진을 주로 찍는 그래서 각 나라의 고물 사진기도 많고 그랬는데 오래된 책도 무지 많았었습니다.

 

저나 나나 촌놈이긴 마찬가지였고 그 친구는 논산 촌놈이었습니다만,

똥고집이 좀 있고 덩치도 산만한데 불의를 보면 미련스럽게 못참기도 하는  온순한 사람입니다...

 

그 봄날에 그런 친구가 지가 평생 춰왔던 탈춤 정기공연을 한다길래

초대를 받아 석촌 호숫가의 송파 놀이마당을 찾았었습니다.,

 

저나 나나 서로를 보면 언제나 가슴이 시려뵌다고 했는데

과연 그 친구는 탈춤을 어떻게 추는 것인지 궁금키도 하였고

익히 들어서야 아는 것이 탈춤이긴 하는데 가까이서 관심있게 보게된 것은 처음이기도 했었습니다.


1977년부터 매해 한 번씩 해온 정기공연이라는데
그가 동아그룹 홍보실에 있으면서 88, 89 년도 리비아 근무하느라 두 번을 빼놓고
이 땅에 있는 동안은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니까
아마도 그에게는 스물 대여섯 번째 정기공연이었습니다.

 

그는 교통사고를 당해 냉동실에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온 사람이기도 하지요...

그 날 햇살은 따스했지만...

남자들은 아쉬워하고
여자들은 싫어할
그런
가는 날의 마지막 봄에...

내 친구가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신나는 그런 춤이 아닌 덩실 덩실

탈속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지만
땀으로 흠뻑 젖었을테고
숨은 턱까지 차오를 법 하더군요...

그런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이
그 때 그 자리에
왜 서러움. 슬픔과 기쁨,
고마움의 눈물이 흐르던 지요.

그가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오랜 세월을
땀 흘리며 보여주고 싶어 할 때
우리가 가깝다고 믿고 좋아한다던 친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나중에 그가 그러더군요,

흥겨운 장단에 몸을 맞추지 못하고
내 손 끝, 발끝이 내 것이 아닌 양
내 가슴에서 자꾸 자꾸 벗어 나가기만 할 때
그 날 27 년 동안 춤을 추던 마당 한가운데 서서
서러움에 겨워 울고 말았다고요...

나도 다른 사람들도 탈 밖에서는 '얼~ 쑤, 좋 다, 잘한다...'
손뼉을 치며 추임새를 보내 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를 알고 있었기에 그가 탈 속에서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사람들은 춤을 추는 자신을 구경하겠지만 그는 탈의 눈으로 세상을... 세상 사람들을 보며 울고 있었을테지요,

춤추는 중년의 남자가 감당 못할 서러움에
그렇게 울었을테고 그런 그의 숨김을 눈치 챈 나도 울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까지 비칠 만큼
봄 햇살이 찬란한 날이었습니다.

그 날 친구들이 왜 그리도 그립던 지요.
친구들이 그립습니다.

미국 같이 먼 나라에 가 있어서,
혹은 그 보다 먼
마음에서 멀리 가 있어서
만나지 못하는 친구들이...


무교동 허름한 골목길 포장마차에서 오랫동안 담배를 끊었던 나에게 다시 담배를 피우게 만들었던 친구

일방적인 다가섬의 어느 여성에게 마음 한 켠을 내어 주었다가 그만 창졸간에 당해버린 실연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포기해야 할 거라고 달래던 나와 밤 새 설전을 벌였었기 때문이었지요...

 


그 친구가 처음 가본 인사동에서 일전 향을 사서 선물을 했었는데 오래도록 아끼며 태웠었지요,

그 인사동엘 혼자 헤매어 보았드랬습니다.

 

통인가게 입구의  골목에서 편지지와 봉투를 샀습니다.
언제 편지를 쓸지도 모르는데
편지라는 게 보낼 곳도 딱히 없는 요즘인데
편지지와 봉투가 하도 맘에 들어서
불각시리 편지를 보내고 싶다는
욕심이 쓸데없이 생겼었습니다.
잃어버릴세라, 두고 올세라
소중히 챙겨서 가져왔습니다.

우표 한 장의 값이 지금 250 원이 맞을는지요,

우표 값이 230 원일 때 마지막으로 편지를 보내봤었는데 20원이 올랐을거라고들 하더군요...

이제나 저제나 우표값도 모르고 편지를 안 쓰는 사람이랑은 친구도 하기 싫어집니다.

지금 미국 가는 편지에는
얼마치의 우표를 붙여야 할까요 ?
잊어먹지 않기 위해 가끔 시내버스도 타보곤 했는데
지금은 얼마를 내야 합니까?

사월의 끝자락에
내 소풍은 친구의 인생이
그리도 탈 속에서 서럽게 춤을 추고 있을 거라는 짐작으로
그 날 나는 울었습니다.

문득 그때는 착한 일이 하고 싶어졌었습니다만 지금은 나쁜 사람으로 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새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