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현의 카미노 (링반데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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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엔 까미노

몽블랑 트레킹

까미l노 2015. 4. 4. 08:58

 
 
하얀 패스를 넘고 고성(古城)의 적막에 갇히다

투르~트리앙산장~샹페~부그 생피에르~발소레이산장 산행

 

 

▲ 트리앙 플라토 설원을 가로질러 트리앙산장으로 향하는 일행. 등뒤로 에귀디트루와 왼쪽으로 트루패스가 보인다.

 

“에이, 그게 무슨 오트 루트예요. 그냥 허릿길 따라 도는 거지.”

파김치 상태로 샤모니로 돌아와 한국인 조문행씨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인 알핀로제에서 하룻밤 자고 난 뒤 만난 허긍열씨(40·한국산악회 회원)는 우리가 지닌 오트루트 가이드북 <Chamonix-Zermatt(The Walker's Haute Route)>을 훑어보더니 웃고 만다. 오트(haute)라는 프랑스어 영어로 하이(high)를 뜻하는데 허릿길만 따른다면 그게 무슨 오트루트냐는 것. 잠시 당황. 그러다 또 한 권의 가이드북인 <Haute Route Chamonix-Zermatt>를 보여주자 이 정도면 오트루트라고 해도 된다고 말한다.

첫 번째 가이드북에 나온 루트의 해발 고도는 2,500m 안팎이지만, 두 번째 가이드북의 루트는 매일 묵는 산장의 위치가 거의 다 해발 3,000m를 넘어서고, 매일매일 빙하를 따라 3,000~3,600m대 고개를 넘어야 하는 힘든 루트였다. 크레바스가 많은 빙하를 넘어서야 하기에 위험도 많았다. 게다가 한 구간의 지도는 샤모니에서는 구할 수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석상명씨와 김창호씨 모두 ‘진짜 오트루트’ 산행에 의지를 모았다. 몽블랑 산행 때 짐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일행은 가능한 한 짐을 최소화했다. 피켈과 아이젠에 폴, 그리고 덧옷 정도만 넣고, 점심은 하루에 라면 2봉과 알파미 1봉, 그리고 간식이 모두였다.

알베르트산장은 트레커들의 천국

 

▲ 거대한 빙하 옆 퇴석 능선에 위치한 알베르산장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트레커들.

 

“맞아, 이게 바로 트레킹이야.”

8월29일, 샤모니에서 하루 쉬고 출발하는데도 다리가 뻐근하다. 트루행 첫 버스(08:30)를 타고 종점인 투르(Le Tour·1,479m)에 도착, 케이블카에 이어 곤돌라를 갈아타고 콜데발머(Col de Balmer·2,191m) 아래 곤돌라 종점에서 내렸다. 몽블랑을 오를 때와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다. 모두들 이게 진짜 트레킹이라고 한 마디씩 하면서 즐거워한다.

에귀베르트(Aiguille Verte·4,122m)에서 몽블랑으로 웅장한 산릉이 뻗어나가고, 그 맞은편으로는 몽블랑 라운트 트레일(트루 드 몽블랑)이 허릿길 따라 나 있는 에귀로제 능선(Massif Des Aguilles Rouges)이 솟구쳐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몽블랑 일원이 하얀 산의 상징이라면 콜데발머 일원은 초록빛 파라다이스처럼 느껴진다. 그 뒤로는 돌로미테 풍광의 바위산들이 든든하게 받쳐주어 더욱 인상적이다.

곤돌라 종점에서 왼쪽 길을 따라 콜데발머를 넘어 동쪽으로 계속 진행해도 우리의 목적지인 샹페(Champex·1,466m) 호숫가로 내려선다. 그렇지만 진정한 오트 루트인 투르 패스(Col du Tour·3,351m)를 넘기 위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몽블랑을 바라보며 걷는다.

▲ 발머콜 곤돌라 종점에서 알베르트산장으로 향하는 석상명씨(앞)와 기자.

 

앞서가는 이들이나 뒤따라오는 이들이나 모두들 발걸음이 가볍다. 노부부도 보이고, 어린 자녀를 데리고 벌써 하산길에 들어선 이들도 보인다. 모두들 평화스런 모습이다. 에귀베르트와 에귀디미디를 포함한 침봉들은 창 든 수문장인양 몽블랑을 에워싸고, 에귀로제 능선과 사이의 깊고 넓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투르에서 샤모니로 이어지는 마을들도 아름답게 바라보인다. 석상명씨는 또다시 “이게 진짜 트레킹”이라며 즐거워한다.

1시간쯤 지나 언덕을 올라서자 모레인 능선과 거대한 빙하 세락이 눈앞에 펼쳐진다. 세락 위쪽의 반짝이는 빙하를 가로질러 바위능선을 넘어선다 해도 오늘 일정의 반밖에 안 된다 생각하니 갑자기 암담해진다. 모레인 능선 위쪽에는 알베르 산장(Refuge Albert·2,702m)이 마치 고성처럼 올라앉아 있다.

▲ 산장 뒤편 바위 지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외국인들.
정오경 도착한 알베르 산장은 트레커들의 천국이었다. 식탁이나 난간에 앉아 바게트나 샌드위치를 먹으며 풍광을 즐기는 이들, 산장 뒤편에 자리를 펴고 위통을 벗고 일광욕을 즐기는 중년의 남자와 근육질의 청년 등, 여유로움 그 자체였고, 그러한 모습과 웅장한 대자연은 너무도 잘 어우러졌다. 갈 길 바쁜 우리들에게는 그러한 여유를 즐길 만한 틈이 없었다. 배낭에 꽂아둔 바게트를 뜯어먹곤 곧바로 투르패스로 향했다.

돌밭 능선길 따라 20분쯤 오르자 투르빙하(Gl. du Tour)가 고스란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위쪽은 하얗게 반짝이는 설원이지만 중단부 아래쪽은 잿빛으로 죽어 있었다. 상단부 빙하로 접어드는 데도 벌써 지친다. 허긍열씨는 알베르 산장에서 투르패스까지 1시간30분이면 충분하다 했지만, 이른 아침 눈이 녹아내리기 전에는 가능할지 모르나 지금처럼 한낮의 따가운 햇살 아래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오후 1시30분쯤 설원 중단부에 튀어나온 너럭바위 위에서 잠시 쉴 때는 그래도 기분이 너무 좋다. 하얀 설원은 보안경을 벗고서는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반짝이고, 하늘은 너무도 파랗다. 그 하늘에 설봉은 설봉대로, 암봉은 암봉대로 찌를 듯한 기세로 날카롭게 솟구쳐 있었다.

▲ 트루패스.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을 이루는 능선상의 고개다.
몽블랑 산행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까닭에 무척 힘이 든다. 설원의 발자국을 따르다 갈림목에서 능선까지 거리가 짧아 보이는 왼쪽 길을 택했다. 한데 능선에 다가서자 낙석 위험이 높은 바위능선이 바짝 서 있다. 오른쪽 능선쪽이 높더라도 위험이 적을 것 같아 그쪽으로 붙었다.

“와, 바룬체 설원을 보는 것 같다.”

패스 위에 올라선 시각은 오후 3시30분. 석상명씨 말마따나 능선 너머에는 기막힌 풍광이 기다렸다. 히말라야 셰르파니 패스 트레킹 때 보았던 바룬체 빙하와 같은 넓은 트리앙 플라토(Plateau du Trient) 설원이 펼쳐지고, 꽃같이 피어오른 침봉들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설원을 가로지른 발자국은 설원 끝에 볼록 튀어나온 오르니봉(Pointe d'Orny·3,270m) 기슭의 트리앙 산장(Cabane du Trient·3,170m)으로 이어져 있었다. 마치 하얀 유선지에 흰 선을 그어놓은 듯 순백의 아름다움 조화였다.

“오트루트 스키팀이 저리 넘어온 것 같은데요.”

▲ 트루빙하를 따라 트루패스로 향하는 일행.
김창호씨는 오른쪽 능선의 안부를 바라보면서 지난해 대산련 오트루트 답사팀의 스키등반로를 짚어낸다. 스키팀은 아르장티에르 빙하(Gl. d'Argentiere)를 가로지르다 샤르도네 빙하(Gl. du Chardonnet)를 따라 샤르도네패스를 넘어 트리앙 플라토로 내려섰던 것이다. 급경사 설사면을 올라선 다음 스키를 벗어 둘러매고 아이젠을 차야만 내려설 수 있을 만큼 가파르고 험난한 패스를 넘는 스키등반이었다. 

이제 패스를 내려서면 스위스 땅에 들어선다. 그렇지만 패스를 넘어서는 게 간단치 않다. 급경사에 눈사태 위험까지 있어 아이젠을 다시 차고 사면을 마주본 채 프런트포인팅 자세로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려서야 했다.

“이게 뭐야. 저 사람들은 쉽게 내려오잖아!”

설원을 내려서자 왼쪽 설사면에서 외국 산악인들이 내려서고 있다. 그들이 넘어선 능선은 둔덕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설릉이었다. 우리는 안전한 사면으로 올라서려 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급사면으로 내려서게 된 것이다.

허긍열씨의 말과 달리 30분이면 가능하다는 트리앙 플라토 설원 횡단은 1시간 반 가까이 걸리고, 트리앙 산장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트리앙 산장은 클라이머뿐 아니라 트레커들에게도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곳이었다. 트레킹 기점인 샹페에서 산장까지 눈을 거의 밟지 않아도 오를 수 있고,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알프스 설봉과 침봉에다 빙하설원까지 조망할 수 있는 데다 이른 새벽 출발하면 크레바스의 위험 없이 빠른 시간 안에 투르패스를 넘어 샤모니쪽으로 하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능선 상에 작은 암봉들이 많아 클라이머들에게는 등반기점 같은 곳이었다. 그런 특성 때문인지 어둠이 몰려올 때까지도 샹페쪽에서 올라오는 트레커들이 이어지고, 어깨를 드러내고 반바지 차림에 산행하는 이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산장 안의 분위기도 몽블랑 산행 때와는 전혀 달랐다. 다음날 등반을 앞둔 긴장감은 전혀 없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와인이나 맥주를 곁들이면서 담소를 나누는 이들의 대화 소리와 웃음소리가 밤늦도록 이어졌다.

 

샹페~부르생피에르 구간은 노선버스로 통과

▲ 트리앙산장에서 샹페로 내려서는 허릿길. 서부 알프스 산군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새벽 5시 기상하자마자 빵과 콘플레이크로 아침을 해결한 다음 6시경 출발한다. 오늘은 샹페로 하산한 다음 버스를 타고 오르시에르(Orsieres)를 거쳐 부르생피에르(Bourg-St-Pierre·1,690m)에서 발소레이(Valsorey) 계곡을 거슬러 발소레이 산장(Cab. de Valsorey·3,030m)까지 올라야 하기에 서둘러야했다. 어제 계획대로 샹페로 내려섰더라면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푹 쉬면서 피로를 풀고, 또 오늘도 여유있게 움직여도 되었겠지만, 어제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탓에 새벽부터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샹페에서 하루 푹 쉬고 가죠. 샤워도 하고, 입맛에 맞는 음식도 해 먹으면서.”

석상명씨와 김창호씨는 샹페에서 하루 푹 쉬고 난 뒤 산행했으면 바랐으나, 화창한 날씨를 조금이라도 까먹지 않으려는 마음에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에 얼어붙은 오르니 빙하(Gl. d'Orny)를 내려서다 오르니 산장(Cabane d’Orny·2,811m)이 앉아 있는 둔덕에 올라서자 수많은 봉우리들과 능선들이 겹을 이루며 일렁거린다. 서부 알프스의 봉우리들이다. 능선이 일렁이는 강도와 비례해 우리의 가슴도 설렌다.

프랑스쪽 알프스 트레일과 달리 스위스쪽은 안내판이 곳곳에 서 있다. 오르니 산장에 세워진 안내판에 따르면 샹페까지 내려가는 케이블카 종점이 위치한 브레야(La Breya·2,198m)까지는 1시간 거리였다. 그 1시간 동안 멋진 파노라마가 눈을 벗어나지 않았다. 능선길을 따르다 오르니 계곡을 가로질러 다시 왼쪽 능선 사면을 가로지르는 허릿길은 길 전체가 알프스 조망대였다. 수많은 봉우리들이 이제 우리가 오늘 턱밑까지 다가설 그랑콩벵(Grand Combin) 산군의 최고봉도 거대한 장벽 같은 모습으로 바라보인다.

고도를 낮출수록 색깔은 흰 색에서 잿빛을 거쳐 푸른 빛으로 바뀌어간다. 산 아래 마을은 푸른 숲 안에 들어서 있고, 맞은편 산등성이는 대관령을 바라보는 듯 넉넉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오전 9시경 브레야에 도착하자 샹페 호수와 마을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바라보인다. 갑자기 갈등이 인다. 저렇게 아름다운 호수와 마을을 그냥 지나쳐야 한다는 게 내려서기도 전에 아쉽게 느껴진다.

▲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서다 바라본 샹페호수.
빤히 바라보이는데도 케이블카로 10분 이상 거리였다. 하기야 표고차 700m 이상을 내려서는 것이니 그만해도 짧은 시간일 것이다. 샹페는 사진에서 보아왔던 것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푸른 호수, 푸른 숲, 우거진 산록, 그 대자연을 배경삼아 들어선 민가와 상점, 숙소 모두 하나 같이 그림이었다. 게다가 휴가철이 지난 까닭에 적막감까지 맴돌아 더욱 포근하게 느껴졌다. 역시 스위스에서는 대표적인 휴양지로 꼽힐 만한 곳이었다.

경치 감상도 좋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지도를 구하는 일이었다. 상페~샹리옹 산장(Cab. de Chanrion·2,462m) 구간의 지형도를 샤모니에서 구하지 못했기에 궁금하기도 했지만, 당장 어디로 가야 발소레이 산장으로 오를 수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여행안내소에서 지형도를 구할 수는 있었지만, 등산용이 아닌 스키투어용이다.

버스를 타고 오르시에르로 내려서서 부르생피에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이 도로 주변은 너무도 한적하고 평화롭다. 차를 갈아타기 위해 1시간 이상 머물렀던 오르시에르 마을의 초등학교는 주변 마을에 사는 어린아이들이 모두 다니는지 수업이 끝나자 우르르 몰려나온 아이들이 버스, 승합차, 승용차 등 여러 대의 차를 나누어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우리네 시골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버스를 타고 부르생피에르에 도착한 것은 12시30분경. 함께 내린 스위스 중년의 여성 산악인도 마침 발소레이 산장이 목표였다. 가이드와 함께 산행에 나선 그녀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산꾼 냄새를 풍긴다. 그들이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는 사이 우리들이 먼저 산행을 시작했지만, 길을 헤매느라 머뭇거리는 사이 추월하고 만다.

▲ 부그 생피에르 마을의 안내판. 발소레이산장 홍보물이 붙어 있다.
발소레이 계곡 초입은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고, 계곡 끄트머리에는 거대한 장벽이 버티고 있다. 역시 작은 산에서는 볼 수 없는 웅장한 풍경이다. 감탄하는 우리의 모습이 신기한지 작은 너구리처럼 생긴 마모트들이 굴 밖에 나와 우리들을 유심히 바라보곤 한다. 메뚜기는 왜 그리 많은지 무심코 걷다가 수시로 메뚜기를 밟곤 한다.

민가가 한 채 있는 코르도네(Cordonne·1,834m)를 지나 턱을 하나 올려치자 초원 테라스. 여기서는 더 많은 마모트가 굴에서 고개를 내밀고 낯선 이방인을 지켜본다. 하기야 예서는 마모트가 토박이 터줏대감이 아니더냐. 갑자기 골 안쪽의 장벽은 더욱 높이 치솟아 오르는 듯하다. 우리를 위협하는 것인가, 반기는 것인가.

골짜기 오른쪽 지능선에 집이 한 채 올라앉아 있다. 프티벨랑(Petit Velan·3201.5m) 북릉의 위태로운 바위턱에 자리 잡은 벨랑산장(2,642m)이다. 지루한 능선에 있는 산장이지만 그래도 일대의 산을 조망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위치였다. 우리가 올라야할 발소레이는 저 높이 있는 벨랑산장보다 400m나 더 높이 있다. 어떤 곳에 있나 궁금해진다.

▲ 부그 생피에르 마을을 등지고 발소레이로 향하고 있다.
폐가로 버려진 아몬트(Chalet d'Amount·2,197m)에서 벨랑산장 길과 갈라져 급경사 오르막이 시작된다. 숨을 몰아쉬며 40분쯤 올랐을까, 초원 테라스에 올라서면서 무너져 내릴 듯 가파른 능선과 그 능선 위에 고성처럼 올라앉은 발소레이 산장이 바라보인다. 이제 에귀뒤발소레이(Ag. du Valsorey) 대장벽이 뿌리까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며칠 전 산행했던 몽블랑 산군이 너머로 바라보인다. 몽블랑에서 그랑조라스와 에귀베르트를 거쳐 에귀디투르(Ag. du Tour·3,540m)로 이어지는 몽블랑 산군이 몽땅 눈앞에 펼쳐진다. 바로 이 때문이다. 이렇게 웅장한 산군을 조망하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 휘파람 불며 걷는 허릿길 대신 이 갈리는 고행길인 오트루트를 택한 것이다.

 

불현듯 고성에 갇힌 듯한 불안감 엄습

마지막 된비알을 앞에 두자 석상명씨가 앞으로 쭉 뺀다. 표고차 600m의 산장에 한달음에 올라갈 참이다. 무너질 듯 가파른 능선길이건만 한 발 한 발 내딛는 데는 당할 도리가 없다. 서서히 높이를 올리는 사이 어제 우리가 넘었던 투르패스와 아르장티에르, 골든스파이어 등이 흰 눈을 얹고 도도히 솟구쳐 오른다. 오늘 아침 저 트리앙 플라토 흰 설원에서 예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대단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내일 발소레이 산장 뒤쪽 능선을 넘어서면 몽블랑 산군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섭섭한 마음이 든다.

오후 6시경 우리가 들어선 산장은 마법사의 집, 아니 진짜 고성(古城)이었다. 1901년, 1924년, 1926년 세 차례의 증축 끝에 지금의 산장이 지어진 것이다. 고성은 조망대나 다름없었다. 발소레이에서 벨랑(M. Belan·3,727m)으로 이어지는 대장벽은 서서히 땅거미가 밀려들고, 그 뒤로 몽블랑 산군 석양빛은 해가 넘어가면서 고향 산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산장에는 우리를 앞지른 두 사람 외에 일본 여성 산악인과 가이드, 그리고 두 명의 현지 산악인이 있을 뿐이다. 30명도 넘게 자는 방을 배정받고, 짐을 놔두고 내려서자 산장 입구에 붙여놓은 사진과 개념도가 보인다. 내일 우리가 넘어야할 플라토뒤쿨와르(Plateau du Couloir·3,664m)~콜뒤소나돈(C. du Sonadon·3,520m)~몽뒤랑 빙하(Gl. du Mont Durand)~샹리온 산장 루트였다.

산장지기는 우리 계획을 듣더니 갖추고 있는 장비를 일일이 확인한 다음 행색을 훑어본다. 그리곤 등산화를 보자고 하더니 고개를 갸우뚱댄다. 현지인들은 모두들 중산화를 신고 산행했으나, 우리들 것은 그에 비해 조금 가벼운 등산화였다. 고개를 한 번 갸우뚱대더니 씩 웃으면서 “괜찮다. 넘어갈 만하다”는 말로 안심시켜 준다.

산장지기에게 루트 설명을 듣고나자 좀이 쑤셨다. 해가 넘어갈 시각이었으나 산장 뒤편으로 부지런히 올랐다. 내일 새벽 올려쳐야할 설사면과 플라토뒤쿨와르를 미리 보기 위해서였다. 해는 완전히 넘어가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구름안개가 밀려오더니 내일 새벽 넘어야할 발소레이 북사면을 뒤덮어 버렸다. 발 아래 산봉들은 노을에 벌겋게 물들고 있다. 갑자기 고성에 갇힌 듯 불안감이 엄습해왔다.<계속>

글 한필석 기자
사진 김창호 쎄로또레


[인터뷰]

샤모니 한국인 가이드 허긍열씨

“설악산 장기산행 들어간 기분으로 지냅니다”


허긍열씨(許兢烈·40)는 4년째 장기산행 중이다. 2001년부터 샤모니에 거주하며 몽블랑 일원을 비롯해 유럽 알프스 곳곳을 등반하고 있는 허씨는 “샤모니에서 지내는 게 꼭 장기산행 들어와 있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고교 때부터 전문등반을 시작해 한국산악회에 입회한 그는 열정적으로 등반을 펼쳐왔다. 86년 히말라야 참랑 등정, 90년 그랑조라스·아이거 북벽, 93년 탈라이사가르 북벽, 96년 매킨리 남벽, 97년 가셔브룸4봉 서벽, 98년 유럽 알프스, 99년·2000년 알프스 4,000m급 봉으로 이어지는 그의 등반 순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가셔브룸4봉 등반 이후 그는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산이 알프스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럽게 등반하기에는 알프스가 최적지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98년부터 3년 연속 알프스를 방문한 다음, 2001년 봄 아예 샤모니로 거처를 옮겼다.

“샤모니는 정말 좋은 곳입니다. 알피니즘이 태동한 곳이고, 그 분위기가 아직도 살아 있으니까요. 아침 먹고 3,000m대의 하얀 산을 올랐다 다시 하산할 수 있는 곳은 알프스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빙하에 텐트 치고 멍하니 있기만 해도 좋으니까요.”

허긍열씨는 목표로 삼은 봉우리를 등반하는 데 몰입하기도 하지만, 생활을 위해 가이드 등반도 하고 있다. 몽블랑뿐 아니라 체르마트 일원의 가벼운 트레킹 코스에서부터 그랑조라스 북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난도의 코스를 안내해준다. 그가 가장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트레킹 코스는 몽블랑을 가운데 두고 한 바퀴 순례하는 투르드몽블랑(Tour du Mont Blanc)으로, 1주일에서 보름까지도 걸린다고 한다.

92년 <창가방 그 빛나는 벽>에 이어 <세비지 아레나>, <위험의 저편에서>, 그리고 <왜 산에 오르지> 등 치열한 등반 활동과 철학을 펼친 책을 번역해 낸 바 있고, 2003년 알프스에서의 치열한 등반과 산 생활을 담은 자전적 등반기인    <몽블랑 익스프레스>를 펴내기도 한 그는 산사진에도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미 그의 작품은 산악전문지나 캘린더 등을 통해 국내 산악인들에게 소개된 바 있다.

홈페이지 www.goalps.com, 이메일 vallot@hanmail.net. 전화 04 50 55 8162.


출처 :동성 주막(東城 酒幕) |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