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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 이야기

까미l노 2013. 1. 21. 22:10

'목련' 꽃이 먼저인 나무

 

▲ 백목련

 

 

 

 

 

신효마을 일주도로변에서 자라는 백목련들이 요새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나무마다 꽃봉오리가 부풀었고 이미 핀 꽃도 더러 보였습니다.

봄처럼 화사한 만개는 아니었지만 여러 송이가 달려있는 나무도 많았습니다.

 

 

 

 

봄에, 잎 나기 전에 피어야 정상인데 9월에 피어 사람 눈길을 끕니다.

아마 지난 8월 하순 연달아 찾아온 태풍 볼라벤과 덴빈의 영향 같습니다. 새로 자란 잎들은 작고 연한 녹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무릇 꽃은 필 때 피어야 제격입니다.

철모르고 피는 꽃도 아름답긴 하지만 애잔함이 더 많습니다.

꽃의 목적은 씨앗이라, 때 아닌 꽃에서는 씨앗을 장담할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봄에 피는 꽃이 여름이나 가을에 피게 되면 겨울나기가 힘들어집니다.

꽃을 피우는데 많은 에너지를 쓰고 또 열매를 맺고 익히는데 에너지를 써야하기 때문입니다.

 

 

 

열매가 제대로 여물 시간이 없는데도 꽃과 열매에 에너지를 집중하다보면 식물 자체는 약골이 되어버립니다.

겨울이 다가오면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있던 잎들도 떨어뜨리는 판국에 익지 않는 열매를 매달고 있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백목련은 꽃을 피운 후 잎이 나는 나무입니다.

어떻게 하여 이런 습성을 가지게 됐는지는 모르나 이들은 가급적이면 꽃을 피운 후 잎을 자라게 합니다.

계절이 달라도 이 습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곳의 백목련나무 잎들은 연이은 태풍에 거의 떨어져나갔습니다.

아직 창창한 여름이라 잎 없는 채 그대로 겨울까지 갈 수는 없었을 겁니다.

잎은 삼손의 머리카락처럼 힘의 원천이라 우선 내려했더니 문제가 있었습니다.

꽃 없이는 잎도 없다는 가문의 원칙에 딱 걸린 것입니다.

여름에는 꽃 없이 잎을 내야 더 좋은데도 꽃 밖에 모르는 백목련은 결국 봄처럼 꽃을 잎 앞에 세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백목련이 꽉 막힌 식물은 아닙니다.

무턱대고 꽃이 먼저 피지는 않습니다. 일장 조건과 온도가 맞을 때만 잎보다 꽃이 먼저 입니다.

낮의 길이와 온도는 꽃을 피우는데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렇게 정해 놓고 살아 어떻게 급변하는 세상에 적응하고 사나 하겠지만 목련은 화석식물이라고 부를 만큼 오래전부터 살아온 식물입니다.

 

또 백목련은 꽃봉오리가 북쪽을 향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꽃봉오리가 점차 자라 아린이 벗겨질 때쯤이면 그 끝이 북쪽으로 휘어집니다.

식물의 싹이 방향성을 갖는 것은 호르몬 영향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나무마다 수많은 꽃봉오리가 북쪽을 향하는 것은 저에겐 희한한 일입니다.

한때 우리 동네에서는 백목련을 울안에 들이지 않았습니다.

무슨 연유로 심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 집에도 꽤 큰 백목련이 있었는데 단지 안 좋다는 소문 때문에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혹시 북쪽을 향해 피는 꽃이라 싫어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핀다고 해서 좋은 꽃이라고 칭송합니다.

 

 

 

 

사실 올레 안에 심지 않는다는 나무나 꽃 중 이유가 알려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복숭아나무는 귀신이 집안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해서 심지 않는다고 했지만 자귀나무, 녹나무는 심으면 왜 안 되는지 이유가 없었습니다.

능소화는 육지부와는 달리 우리 동네에서는 심지 않는 나무인데 최근에 꽃가루에 문제가 있다고 밝혀졌습니다.

옛날 어른들은 어떻게 능소화의 해악을 알았을까요.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벌초를 하러 다니다 신효마을을 지날 때 작정하고 백목련나무 아래에 차를 세웠습니다.

9월에 피는 꽃도 북쪽을 향하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꽃은 다른 일반 꽃과 똑 같이 피어 있었습니다.

몇 개체가 동쪽으로 혹은 서쪽으로 봉오리 끝이 돌아가 있었을 뿐입니다.

문득 임금을 향해 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까 궁금해졌습니다.

 

목련은 우리나라에서 한라산이 자생지입니다. 흔히 보이는 목련은 백목련 자목련이라 부르는 나무들입니다.

늦은 봄 성판악 못 미처 숲 사이사이에 하얗게 핀 진짜 목련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목련은 잎이 난 후 꽃이 피는데 한때 후박나무라고 잘못 불렀습니다.

서호리 ‘무덤앞밭집’에서 엄청 큰 일본목련을 본 적이 있습니다.

주인은, 부친께서 생전에 우의를 다지는 뜻으로 심은 것이라고 알려줬습니다.

 

그나저나 또 태풍이 코앞에 와 있습니다.

새로 난 잎과 꽃들이 전부 또 모지라진다면 신효동 백목련나무는 어떠한 반응을 보일런지...

아마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환경이 나빠도 다시 일어설 것 같긴 합니다. 달리 화석식물이겠습니까.

 

 

 

 

 

 

 

 

 

'젖 물리는 나무' 예덕나무 이야기

 

 

 

산에는 어른 발자국 크기 마다 씨앗들이 수천 개 혹은 수만 개가 있다고 합니다. '

씨앗들은 땅 속에서 잠을 자다 조건이 되면 발아를 합니다.

예덕나무 씨는 고온에서 발아를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산불이 나거나 개간을 하는 등 숲이 훼손되어 햇볕이 땅에 닿아 토양 온도가 높을 때 싹을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덕나무가 자라는 곳은 옛날 한 때 공한지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임도 주변이나 개간지였던 곳에는 어김없이 예덕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북촌 앞바다에 ‘다려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다려도에 간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큰 예덕나무를 보았습니다.

제법 큰 나무였습니다.

예덕나무로 ‘솔박’ 등 생활용구를 만들었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비로소 수긍이 갔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지금의 한남리 쓰레기 매립장 인근에서 엄청나게 굵은 예덕나무를 만났습니다.

천연기념물 감이었습니다.

족히 세 아름은 넘었습니다.

같이 갔던 사람에게 그때 그 예덕나무의 위치를 물었는데 매립장 인근은 분명한데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식물은 움직일 수 없지만 벌레가 나타나면 나름대로 방비를 합니다.

순순히 당하지만은 않습니다.

어떤 식물들은 벌레가 달려들면 휘발성물질을 분비해 적이 출현했다고 알립니다.

 

“돈 쓰쓰돈 쓰 돈쓰돈돈”
“쓰돈쓰돈 돈돈돈돈 돈돈돈쓰 돈 쓰쓰쓰 돈돈돈 돈돈쓰돈”

 

무전을 받은 형제나무들은 일제히 잎을 맛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 무전은 말벌을 부르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말벌은 벌레의 천적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벌레는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어떤 나무들은 병정을 키웁니다.

젖을 주며 개미를 부리는 것인데, 예덕나무도 개미에게 젖을 물리는 유명한 나무입니다.

개미들은 젖을 먹으려 예덕나무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벌레를 쫒아 냅니다.

식물들이 분비하는 젖에는 당분만 있고 단백질 성분은 없다고 알려졌습니다.

 

예덕나무 씨는 고온에서 발아한다고 나와 있지만 귤을 따다 보면 귤나무 아래에서도 예덕나무 유묘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설명해야하는지 갑갑합니다.

저는 바코드를 읽듯 숲에 들어가서 나무를 읽고 싶습니다.

저 나무는 저런 사연이 있어서 저렇게 자라고 있고 또 이 나무는 또 이런 사연이 있어서 이렇게 살고 있구나 따위를 말입니다.

 

 

@@@@ 에덕나무와 제주도의 복당낭은 새 잎이 거의 비슷한데

예덕은 고목으로도 자라지만 아래의 복당낭은 관목으로 잔가지만 게속 생겨나는 타입입니다.

예덕은 넓은 달걀형으로 약간 뾰족한 끝과 밋밋한 가장자리인데

잎몸이 3개로 약간 갈라지기도 하는 반면 복당낭은 세갈래로 갈라진 확연한 결각이 있다.

예덕은 우유같은 진이 나오고 목당낭은 빨간 진이 나온다.

 

 

'복닥낭...쉽게 껍질을 벗길 수 있는 나무'

 

“진짜 복닥낭 파살 거과?”
“무사 실프냐?“
“그건 아니고예...”
도심으로 이사 가는 도예가 송선생님과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복닥낭’이라니, 생각조차 못했던 일입니다.

누가 심는 것을 본 적은 물론, 지금껏 심었다는 소문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지난 번, 마당에서 억새를 키우실 때는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복닥낭은 아닙니다,

정원수로는 턱없이 모자란 식물입니다.

꽃이 고운 식물도 아니고, 예쁜 단풍이 드는 것도, 열매를 따 먹으면 배가 부르는 식물도 아닙니다.

 

복닥낭은 발이 무척 좋은 식물입니다.

땅 속으로 뿌리를 뻗어가다 불현듯이 지상으로 어린나무를 내고 또 뻗어 가다 내놓습니다.

뿌리는 사방팔방으로 뻗기에 어린 복닥낭들은 어미를 중심으로 자라다 이윽고는 누가 어미고 누가 새끼인지 모르는 숲이 됩니다.

 

 

마치 대나무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홀로 사는 복닥낭은 드물고, 모여 사는 복닥낭이 훨씬 많습니다.

농사짓는 저는 이런 습성 때문에 복닥낭이 성가십니다.

복닥낭 하나가 담굽에라도 슬쩍 살기 시작하면 어느 새 많은 복닥낭과 싸워야합니다. 복닥낭은 저에겐 타도의 대상입니다.

 

이런 복당낭을 심으시겠다니, 그것도 이름을 대면 다들 아는 아파트 화단에 말입니다.

미적 감각이 특별한 분이라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하고 많은 나무 중 ‘복닥낭’을 우선 챙기는 마음을 제 수준으로는 감조차 잡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복닥낭의 ‘해’는 알았지만 ‘아름다움’에는 깜깜한 것입니다.

 

복닥낭에 아름다움이 있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어쩌면 참 슬픈 일입니다.

누구는 아름다워 아파트로 거처를 옮길 때도 갖고 가는 식물인데 말입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말로 전해 들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 안타깝습니다.

 

‘복닥’은 껍질을 뜻하는 우리말입니다.

‘복닥낭’은 껍질을 잘 벗길 수 있기에 붙은 이름입니다.

어릴 적 병정놀이를 하며 들판을 쏘다닐 때 복닥낭의 껍질을 벗겨 수갑(?) 대신 썼습니다.

 

우리 동네에서는 주로 소나무로 칼을 만들었는데 선생님께서 들판을 지키실 때는 복닥낭으로도 만들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소나무 칼인 경우 껍질 부분을 골고루 독독 두드리면 껍질이 분리되어 칼집이 생겼습니다.

칼은 칼집에서 꺼내야 품위가 섭니다.

비록 소나무나 복닥낭 막대기일망정, 칼집에서 칼을 꺼내면서 “왜적이 쳐들어온다”라고 외쳐야 그럴 듯한 법입니다.

 

‘복닥낭’ 새순은 빨갛게 나옵니다. 이 순을 몸에 본뜨며 놀았습니다.

솔순을 꺾으면 진이 나오는데 이 진을 바르고 복닥낭 빨간 새잎을 덮어 누르면, 잎의 형상으로 붉은 물이 들었습니다.

서로 이 문양을 뺨이나 이마에 새겨주며 낄낄 거렸습니다.

 

표선 백사장에 미군이 들면 아이들은 성인용품을 주워 풍선에 바람 넣듯 볼이 아프게 불었습니다.

터지지 않고 무척 크게 늘어나는 풍선을 아이들은 좋아했습니다.

사물이 생기면 이름은 따라오는 것이 이치인지라 사람들은 이 성인용품을 O복닥이라 불렀습니다. 선생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지금 부르기에는 너무 직설적이라 웃기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한 단어지만 어찌 생각하면 그럴듯하기도 합니다.

 

‘복닥낭’은 가벼운 나무입니다.

그래서 땔감을 사고 팔 당시에는 ‘복닥낭’은 나무꾼들에게는 최고 인기였습니다.

땔감은 부피로 파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질 수 있는 짐의 무게는 한계가 있어 부피가 클수록 좋기 때문입니다.

화력은 결이 치밀한 나무에 비하면 못했지만 그래도 쓸 만했다고 전합니다.

 

 

 

 

 

'검북낭...푸조나무'

 

 

 

 

잔칫집에서 잔치를 먹은 후 휘휘 마당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말 건넬 사람을 찾기 위함입니다. 잔칫집 풍경은 늘 그렇습니다.

왁자하게 ‘윷 유는’ 사람들, 삼삼오오 둘러 앉아 잡담하는 사람들, 간이 술상 앞에서 손짓 크게 하는 사람들,

잘 ‘고라줌직 헌’ 사람을 골라 옆에 가 은근히 말을 붙입니다.

 

“검북말이라, 알고말고 지금은 죽어비었주만은 상효에 **라고 이서나서 그 집 올레에 큰 검북낭 이서신디 학교 끝나면 그 낭에 올랑 살았주마.”

“그 당시 돈게 이서서게. 돈 거라고는 검북 뿐이었주.”

“거시기 거 누게라 가인 늘레 빵 내려오당 대가리 까정 피 찰찰 해났주. 지금이사 겅해나신거 이지비어실테주마는.”

“검북은 노리롱허게 황들어사 먹어지메. 울령도 먹어났주 황든 검북을 탕 왕 조막단지에 미뿌쟁이를 넣고 그 속에 놔두민 빨리 익어나서.”

 

 

“검북낭은 우리 껀디 늘레 빵 내령보민 노미 조팥이라났주.

조 고고리 꺾어졈짼 막 혼나곡 해났주. 긍해도 정다슬지 못행 다시 허곡, 자사린 그때가 더 했주마.

 ‘개장통’이 무슨 말인 줄 몰라도 그디 큰 검북낭 이서나시메.

 

 

 

내창으로 자우룽허게 서 이서나신디 그 낭에 올란 검북타먹단 보난 노시 내려올 수 이서사주게.

긍해연 보난 늘레 빵 내려가민 아래 늘레가젱이를 잡아짐직헌거라, 잡아질 리가 이서,

털어졌주마 나 그때 조무쳐나서. 옆집 할망이 어떵행 봐사신디 야이야 야이야 흔들언 깨웠주 그 후 난 경끼도 허곡 했주마.”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선배들은 아무래도 안면이 부드럽습니다. 무턱대고 조용한 곳으로 잡아끕니다.

“검북을 솔망도 먹어났주게, 솥에 물과 검북을 같이 놩 불 솜앙 궤미 건져냈주. 그것도 맛 좋아서.”

“당원이나 뉴슈가 같은 게 어디서나서 그냥 솔맜주.”

 

 

“말도마라 가이 다른 것은 못해도 낭질은 기똥차나서 긍허난 검북 익어가민 나 가이 꼬붕해나시녜 혼방울이라도 더 얻어먹젠.”

“폭은 먹을 때 빠삭빠삭 소리나는디 검북은 검은 씨를 퉤퉤 바끄멍 먹으메.

노피 올라지는 아이들은 아래에 이신 아이들 대멩이 위로 씨를 뱉아내곡 해났주.”

“감저빼떼기 솔망먹을 때 쓰젠 헌 당원을 검북솔믈때 노민 참 맛좋아서게.”

 

 

 

“그 집 할망은 무사 겅 독해신디사, 작대기 가저당 또꼬망 숙데기국. 지금 생각해보믄 낭에서 털어지카부댄 겅해실거라게.”

같은 식물인데 이름이 여러 개인 경우가 있습니다.

지역에 따라 다르게 부르는 일은 흔하고,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려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

식물 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식물이 이런 처지면 오해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일례로 생강나무를 제주에서는 ‘가세출’ 혹은 ‘가세촉’이라 부르는 반면, 강원도에서는 동백나무라고 부른다 합니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노란 동백꽃은 그래서 동백나무가 아니라 생강나무입니다

 

 

.

 

 

 

우리 또래가 어릴 적 한번쯤은 올라 ‘검북’을 따 먹었던 ‘검북낭’은 푸조나무가 정명입니다.

‘검북’이 열리는 나무라 ‘검북낭’인지 ‘검북낭’의 열매라서 ‘검북’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전자 같습니다. 푸조 또한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한국 식물명의 유래(이우철)’를 보니 남부 방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주전부리 감이 귀했을 때 ‘검북’은 우리들에게 최고 인기였습니다.

동네 ‘검북낭’ 마다 아이들이 가득했습니다.

‘퐁낭’은 가지가 약했지만 ‘검북낭’은 질겨서 웬만한 가지는 부러지지 않아 비교적 안전했습니다.

 

 

 

 

 

 

 ‘검북’은 노르스름하게 황이 들었다 검게 변하는데 황이 들기 시작해야 먹을 수 있습니다.

탱탱하니 검게 익은 ‘검북’의 맛은 참 달았습니다.

 

 

 

‘검북’은, 아이들이 누구나 오를 수 있는 가지에는 드물고 오르기 힘든 곳에 많았습니다.

저처럼 ‘낭질’이 서툰 아이들은 아래가지 언저리에서 ‘황’이 들것도 없는 ‘검북’이나 따 먹으며 컥컥 거렸지만

나무를 잘 타는 아이들은 외줄 가지 끝에 올라 보란 듯이 맛있게 먹었습니다.

 

 

 

 

 

한 방울만 달라고 해도 약 올리며 주지 않던 아이들,

너무 먹고 싶어 외가지 끝에 올랐다가 바람 한 번에 몸이 굳어 옴짝달싹 못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내려올 때도 고수들은 ‘늘레빵’ 내렸습니다.

발을 아래로 하여 점차 가지 끝으로 이동하면 가지가 점점 휘어지는데

가지 끝을 잡고 동갈동갈 거리다 땅으로 사뿐 뛰어 내리는 것을 ‘늘레빤다’라고 합니다.

7,80대의 할아버지들도 어릴 적 ‘늘레빴’던 이야기를 전해주며 그 당시로 들어가신 듯 신나하셨습니다.

 

 

어떤 집에서는 황이 들기 시작하면 따다가 ‘울려’ 먹기도 했습니다.

‘울려’먹는 방법도 시대에 따라 달랐습니다.

제일 오래된 방법은 조막단지에 ‘미우쟁이’를 넣고 그 속에 검북을 넣어 두는 것이었습니다.

 ‘미우쟁이’는 억새의 꽃입니다.

 

우리들은 ‘검북낭섶’으로는 시계 유리를 닦았습니다.

잎 표면은 꺼끌꺼끌해서 이것으로 시계 유리를 닦으면 웬만한 흠집은 지워졌습니다.

손바닥선인장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가시가 촘촘히 박혀 있는데 이것이 몸에 들면 제거하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어떤 분은 ‘검북낭섶’으로 닦았더니 쉽게 제거되더라고 알려줬습니다.

 

‘검북낭’을 검팽나무나 풍게나무로 해석해 놓은 곳이 많습니다.

 

 

모두 느릅나무과 식물이라 비슷해 보여 오역이 생긴 것 같습니다.

앞에 말씀 드렸지만 ‘검북낭’은 푸조나무가 표준어 입니다.

제가 ‘검북낭’을 활자에서 처음 본 것은 ‘김광협’님의 ‘돌할으방 어디감수과’라는 책에서입니다.

 

 

어느 날 서점에서 사투리로 된 시집을 보았습니다.

첫 장을 넘기자 우리 동네 지명 ‘보금물’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검북낭’을 발견했습니다.

표준어를 써야 착한 어린이라고 교육을 받은 저는 사투리 시집도 신기했지만

우리 동네 지명과 특히 ‘검북낭’이 활자화 된 것에 많이 놀랐습니다.

 


검북낭 올랑 검북 타 먹곡

검북낭 올랑 검북 타 먹곡
검북낭 올랑 바당 바래여보곡
폭낭 올랑 폭 타먹곡
폭낭에 올랑 자리태위도 바래여보곡
검북낭 올랑 줄 노리곡
폭낭은 올라도 줄은 못 노리매
검북낭은 무사도 겅 큰디
폭낭은 무사도 경 높은디
우리 인생 칠십이엔 호주마는
검북낭 폭낭은 백 년을 산다 천 년을 산다
우리 인생도 백 년 천 년을 살민
저 검북낭 폭낭이 되어지카.
(김광협 돌할으방 어디 감수광 중에서)

 

 

 

동네 검북낭을 지금도 셀 수 있을 정도로 어른들도 검북낭에 대한 사연이 많았습니다.

동네마다 누구네 올레 혹은 우영에 ‘검북낭’이 있었고 그 주인이 너무 독했다는 이야기들...

늘레빠다 머리 까졌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머귀나무'… 방장대 만드는 나무

 

 

 

오랜만에 머귀나무를 찾아 나섰습니다.

우선 서귀포 시내 아랑조을거리 근처로 갔습니다.

일방통행로를 마음속으로 짚으며 머귀나무가 사는 곳 까지 무사히 당도했지만 나무는 없었습니다.

 

 

 

 

큰 건물 사이, 무엇인가 빠진 듯 휑한 공간, 깔끔하게 정리된 것이 눈에 설었습니다.

지난 태풍에 해를 입었을까? 머귀나무는 낮은 집 뒤편에 서있었고,

집처럼 늙은 몸에서 가지들이 제법 나와 아직 끄떡없다고 알리던 나무였습니다.

 

 

 

 

행여 홀로 남은 사연을 들을 수 있을까 해서 근처에 갈 때 마다 먼저 머귀나무를 만난 후 일을 보곤 했습니다.

혹시 다른 곳에 왔나 싶어 동네를 두어 바퀴 더 돌았습니다. 내 나무가 아니건만 많이 서운했습니다.

 

 

 

 

 

 

   

■ 머귀나무

 

 

 

 

 

 

 

 

 

크기만으로는 단연 보물감인 서귀포의료원 마당에 있는 머귀나무에게 가려다

공사 중임을 생각하곤 토평에 있는 머귀나무를 보러 방향을 잡았습니다.

 

 

 

전에 나와 인연이 닿았던 나무입니다. 머귀나무가 있는 집,

일을 도울 때 걸리적거려 자르자 했지만 주인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방장대로 쓸 것이라며 말렸습니다.

밭에 가고 올 때 그 집 앞을 지나가야해서 자주 봤지만 새로 큰 길이 나는 바람에 한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머귀나무를 우리 동네에서는 모기낭이라고 부릅니다. 가시가 많고 여름에 왕재가 많이 붙는 나무입니다.

머귀나무로 궤도 만들었다고는 하나 저는 그렇게 큰 머귀나무를 본적이 없습니다.

머귀나무는 가지 끝이 뭉툭하게 생겨서 힘이 넘쳐 보입니다.

 

 

 

이 덕분에 잎이 진 겨울철에는 멀리서도 알아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가지에는 가시가 아주 촘촘히 박혀 있습니다.

가시는 무엇인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방책일 텐데 왕재나 새들은 아랑곳 않고 앉습니다.

 

 

 

동네 일가에 상이 났을 때 약촌머귀나무에 올라 방장대 감을 잘랐던 일이 기억납니다.

가시는 젊은 가지에 더 독하게 자랍니다.

상장(喪杖)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대나무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오동나무나 버드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아버지는 하늘이고 어머니는 땅입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났다고 옛 어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둥근 대나무를,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오동나무나 버드나무 밑동을 네모나게 깎아 썼습니다.

오동의 동은 같다, 즉 아버지와 같다는 뜻이고 버드나무 류도 비슷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머귀나무

 

 

그런데 제주에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머귀나무로 방장대(상장)를 만듭니다.

가시가 어머니의 정처럼 많아서 어머니를 생각한다는 뜻에서 머귀나무 지팡이를 짚는다고 들었습니다.

 

 

머귀나무 밑동을 네모지게 깎지 않고 단지 가시를 훑어 내는 정도로 다듬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육지부에서 오동나무의 이름이 한때 머귀나무였습니다.

양반들은 정원에 나무를 심을 때 나무에 뜻을 뒀습니다.

 

 

 

예를 들어 담양 소쇄원은 우리나라 정원 중 으뜸인데 양상보라는 제주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소쇄원을 해설한 글에 살구나무는 천년만년 살구() 지고 즉 오래 살았으면 하는 소망하는 뜻이고,

동백나무는 사철 변하지 않는 효를, 산수유는 자손의 번성함을,

복숭아나무는 무릉도원을, 배롱나무는 방사의 의미로, 회화나무는 인생의 허무함을,

석류나무는 집안의 결속을, 앵두나무는 우애의 상징이라 심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주변에 보면 특별한 뜻을 두고 가꾸는 나무는 없고 단지 쓰임으로 심은 나무는 몇 종류가 있습니다.

황벽나무, 덧나무, 동백나무, 팽나무 정도 생각납니다.

황벽나무가 있는 집은 전에 소를 키웠던 적이 있고 덧나무는 지금도 약으로 쓰며,

동백나무는 물과 관련이 있고, 팽나무는 거름으로 썼습니다.

 

 

 

 

머귀나무인 경우 장례식 때 쓰는 나무라 멀리할 것 같은데 올레 안에서 살게 합니다.

요즘은 장례용품을 일괄 구입하는 추세라 방장대 감을 구하러 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니 집에 머귀나무를 키워 훗날을 대비할 일은 더욱 없겠지요.

모기가 잘 먹는 나무라서 모기낭이라 부른다고 우기던 어릴 적 일이 부끄럽습니다.

 

 

 

 

 

 

 

'야고싯대 담뱃대'

 

 

 

 

 

 

 

야 - 야고싯대담뱃대 - 대가리큰놈중국놈 - 논팔아먹고집사고 - 고발했다네 - 냇가에빠진물장군

군복입었다고째지마 - 마루밑에홍길동 - 똥통에빠진호랑이

 

 

 

 

아직도 제 입에 남아 있는 노랫말입니다. 끝말잇기 놀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릴 적 입 돌림으로 배웠는데 일부 기억 합니다.

“야 - 야고싯대담뱃대”가 무슨 말인 줄도 모르면서 배웠고 따라 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라고 생각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노래가 다른 마을에도 있었을까 궁금했습니다.

몇 몇에게 물어봤더니 제주시 동문통에 살았던 친구가 초등학교 다닐 때 쯤

다음과 같이 부르며 고무줄놀이를 했다고 알려줬습니다.

 

 

야 - 야고싯대담뱃대 - 대가리큰놈중국놈- 놈작머리하르버지장 -장독대에올라서서

- 서쪽하늘바라보면 - 면사무소도보이고 -고등학교도보이는데 - 대학교도보인다 - 다했다

( 놈작머리하르버지장은 알쏭달쏭하다고,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노래 가사 중 ‘야고싯대’의 야고는 식물 이름입니다.

야고라는 식물은 오래전에 알았지만 노래와 연관시켜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혹시 ‘야고싯대...’의 야고는 식물이름이 아닐까 추측했습니다.

 야고의 생김새가 꼭 담뱃대처럼 생겼기 때문입니다.

대한식물도감을 쓴 이창복님은 칼럼에서 제주대학 식물원 박정덕 원장이

 서귀포 아리랑고개 근처에서 발견하여 야고라 칭했다고 밝혔습니다.

발견한 정확한 년도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 무조건 따라 부르던 그때 노래가 야고라는 식물을 발견하기 전부터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럴 개연성은 충분히 있을 것 같습니다.

 

 

야고는 줄기가 아주 짧아 거의 다 땅속에 묻히고, 잎은 흔적만 있습니다.

잎은 줄기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당연한 일입니다.

이렇게 줄기와 잎이 퇴화한 것은 남의 집에 얹혀사는 입장이니 어쩌며 주제를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말의 양심은 있는 것이지요. 희멀쑥하게, 벙댕이지게,

 끊임없이 자라서 결국 숙주식물을 죽이는 참나무겨우살이와 비교하면 말입니다.

잎이 없으니 당연 엽록소도 없겠지요. 식물에서 엽록소는 아주 중요합니다.

 

엽록소는 녹색을 띠는데 녹말을 만드는 공장입니다.

식물은 이 녹말과 뿌리에서 흡수한 무기물들을 이용하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엽록소가 없는 식물은 혼자 살지 못합니다.

살려면 다른 식물이 만든 영양분을 강탈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죽은 식물체에서 먹이를 구해 살거나, 살아 있는 몸에 붙어 영양분을 빼앗아야 합니다.

야고는 살아 있는 억새 따위의 뿌리에 붙어 영양분을 가로채서 살아갑니다.

 

 

참고로 남이 만드는 영양분을 훔쳐 사는 식물을 기생식물이라고 부릅니다.

동물의 몸속에서 영양분을 도둑질해 먹고 사는 기생충과 비슷합니다.

제주에 사는 야고는 주로 억새에 살지만 양하에도 기생합니다.

층층고랭이에 붙어사는 모습도 본 적이 있습니다.

최소한의 줄기와 잎을 가져서 그런지 숙주식물의 생육은 비교적 좋았습니다.

단지 양하는 점차 세력이 약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모르는 다른 원인도 있을 것 같긴 합니다.

 

 

 

야고는 서울 하늘공원에서도 자라고 있습니다.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을 만들 때 인근에 있던 난지도 쓰레기매립장을 자연생태계로 복원했습니다.

 이게 하늘공원입니다. 하늘공원의 명물 중 하나가 억새밭인데 제주산 억새를 옮겨 만들었습니다.

그때 야고가 붙어간 것입니다.

 

 

 

일부 도서지방과 남해안에서도 야고가 자라긴 하지만 중부지방에서 자란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서울서 야고가 살 수 있는 것인지 그저 신비로울 뿐입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수출할 때 야고 값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보기엔 제주 억새도 좋지만 야고도 가치가 아주 많습니다.

 수출업자가 억새 값만 받았다면 통탄할 노릇입니다.

 

 

 

야고가 제주에서만 자란다고 알려졌던 시절,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야고를 보러 왔습니다.

아리랑고개의 야고가 비행기 좌석을 간여한 부분이 있다고 말하면 다들 믿지 않았습니다.

모니터링 하러 하늘공원에 갔을 때 우리 일행 중 한 분이 신기한 꽃을 처음 본다며, 야고 앞에 쭈그려 앉아 일어설 줄 몰랐습니다.

 

 

 

 

오충근 시민기자의 식물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