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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엔 까미노

정선 성마령 옛길

까미l노 2010. 3. 26. 23:44

고개가 오죽 높고 험했으면 별을 만질 수 있다고 했을까. 정선읍 용탄리와 평창군 미탄면 경계에 있는 성마령(약 960m). 성마령은 정선으로 드는 가장 큰 길, 또 제천 원주 서울 등지로 가기 위해 누구든 넘어야 했던 고개였다.

 

 

지형의 험난함을 가리켜 앞산고 뒷산을 이어 빨랫줄을 걸 정도였다는 정선땅. 이곳으로 부임하던 오홍묵 군수 부인이 성마령을 넘으며 읊었다는 아라리 한줄.

 

 

"아질아질 성마령/야속하다 관음베류/지옥 같은 정선 읍내/십년간들 어이가리//지옥 같은 이 정선을/누구 따라 아 여기왔나."

 

 

비단 군수부인뿐이었으랴.

성마령을 넘어다니던 장꾼과 서민들이 읊었던 성마령에 관한 아라리는 원색적인 표현으로 수록 대상에서 누락된 것까지 포함하면 부지기수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용탄리 행매동에는 역(驛과)과 원(院)이 있었고,

출장 가는 관원을 위한 국영 여관인 '행마원'을 두고 조선조 세종때에는 마을 사람 중에서 원주를 뽑아 관리케 하였다는데...

 

 

그런 성마령이 순전히 문헌 속의 고개로만 기억되기 시작한 것은

정선에 근대 교통이 보급되면서부터다.

버스가 비행기재로 다니기 시작한 것이 1954년, 그후 제천에서 영월 정선 사북 고한 삼척으로 이어지는

산업 횡단철도가 개통된 것이 1973년이다.

 

 

그러나 하루에 고작 한두 번 운행하는 버스편으로 문명에 혜택을 느끼긴 힘들었을 법.

평창이나 제천으로 볼일 가는 사람들은 그런 가뭄에 콩 나듯 운행되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

차라리 성마령이나 비행기재를 넘어 버스편이 많은 미탄까지 한동안 걸어다녔다.

 

 

정선 최대의 관문 성마령 아랫마을 용탄리에는 지금도 그 길을 기억하는 사람이 살고 있을까.

성마령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오늘 엣길 산행에는 10명이나 참가,

대식구를 이룬다. 정선군청 산악회원인 나병기씨(50세)를 비룻, 고한 노두산악회의 주춘옥(43세, 부회장) 전재옥(33세, 등반대장)원미화(30세) 전영옥(28세)씨, 태백 한마음산악회의 이상본(50세), 이서규(49세)씨등. 유서 깊은 옛길을 찾아가는 취재 일행의 마음이 설렌다.

 

 

정선 읍내에서 평창 가는 42번 국도. 성마령가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조양강을 끼고 달린다.

 

 

그러나 본디 옛길은 강 건너편의 콘크리트 포장길이다.

강을 한번도 건너지 않고 고개까지 갈 수 있었던 유일한 길.

국도에서 훤히 건너다보이는 옛길은 절벽 아래로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조양강을 건넌 일행의 차량은 용탄 3리 버스승차장에서 가리왕산휴양림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왼쪽의 행매동 골짜기로 접어든다. 행매동 드는 길은 협곡이다.

 

 

비탈진 밭에는 배추 모종을 심던 아낙들이 오전 새참을 먹는 중이다.

한때는 가구수가 50호에 달했다는 행매동.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놀던 벽탄초교행매분교 터에는 배추 모종이 심어진 비닐하우스로 꽉 찼다.

성마령 길을 훤히 꿰고 있다는 김대옥씨(60세) 집은 행매동 맨 위쪽에 있었다.

 

 

미리 연락을 해둔지라 일행을 발견한 김씨가 일손을 멈추고 집 뒤의 응고개까지 길을 안내해준다. 응고개에 오르니 지능선을 따라 우마차길이 나 있고 김씨가 높다랗게 솟은 밋밋해보이는 능선을 가리킨다.

 

 

"저곳이 원님도 넘어다녔다는 큰성마령입니다. 어디 원님뿐입니까?

서민들도, 시집가는 가마도, 소도 말도 모두 넘던 굉장히 큰 길이었지요.

사람이 안다닌 지는 30년 가량 됩니다.

 

 

제가 어렸을 대만 해도 도회지로 나갈 대도 미탄장 보러갈 대도 전부 이 고개로 넘어다녔지요.

작은 성마령은 훨씬 남쪽인데 그곳으로도 사람이 다녔지만 원님도 그렇고 큰성마령을 더 많이 넘었지요."

 

 

김씨는 행매동을 지금도 '원골'이라 부른다.

행매동에 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에 따르면 원에는 길손들을 위해 쌀과 부식 등 비상식량과 짚신 등을 비치해두었고

이를 사용한 사람은 얼마 만큼의 노잣돈을 두고 기을 떠났다고 한다.

 

 

이런 역과 원을 관장하는 역관에게는 나라에서 하락한 땅 둔전(屯田)을 주어 농사짓게 했으며

역리(驛吏) 역졸(驛卒), 역노(驛奴), 역말(驛馬)을 거느리게 했다.

 

 

마을에는 원에 관련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그 엣날 주막집 한채가 남아있다며

학교 아래에 있다는 폐가를 일러준다.

 

 

집 한 가운데에 부엌이 있고 아궁이가 여러 개 있던 함석지붕의 페가.

그러고보니 올라오면서 일행도 무심결에 문틈새로 그 빈집을 기웃거린 게 생각이 난다.

 

 

"정승구뎅이를 지나면 철탑도 도록 나오고 거기서 그대로 질러 오르면 또 임도가 나오는데

그러면 또 직진해 올라가야 합니다.

철탑 도로를 지나서부터는 나무들이 많이 넘어져 있어 길 찾기가 조 어려울텐데

임도 다음부터는 가운데 움푹 들어간 옛길이 제법 잘 남아있습니다.

 

 

혹 길을 잃더라도 이제는 '큰짐승'나올 일이 없으니 고개쪽만 주시하며 오르면 돼요.

고개에 올라 돌탑이 있으면 그곳이 성마령입니다."

 

 

김씨를 배웅한 일행들은 잠시 '큰짐승' 얘기로 꽃을 피운다. 큰짐승? 산골 사람들에겐 두말할 필요 없이 호랑이다.

 

 

호랑이가 무서워 도적이 무서워 열 사람이건 스무 사람이건 떼지어 넘던 고갯길. 옛길 가에는 잣나무 천지다.

 

 

원님들이 정선에 들어올 때 하도 한골이라 한번 울고 떠날 때는 잣죽이 뭇내 아쉬워 또 울었다는데....

 

 

얘기도 많고 사연도 만은 성마령 위로 마알갛게 개인 파란 하늘이 흐른다. 5분 남짓 걸어 길이 한번 좌회전하는 곳에 특이하게 조성된 무덤이 보였다.

 

 

움푹 꺼진 분지에 묘가 들어앉은 것인데 정선 전씨 가문에서 몇해전 발굴하여 다듬었다는 이 무덤의 정체는 고려말 공민 왕때 정승 전채명이란 사람의 것.

 

 

그는 이성계ㅔ 불복해 손자를 데리고 이 산골짜기로 숨어들어 여생을 보냈는데

훗날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할 보문관 대제학을 지낸 손자 전채문이

이곳에 자신의 할아버지 묘를 모셨다 한다.

 

 

녹음이 짙어가는 숲길은 부드러웠다. 김씨가 말하던 철탑개설용 도로가 나오자

일행은 일러준대로 곧장 직진해 옛길을 찾아간다.

 

 

길은 능선을 따라가다 남쪽의 골짜기 하나를 건너자 이번에는 능선 오른쪽 사면을 따라간다.

5여분 정도 희미하게 보이는 예길을 한 걸음 한걸음 밟아가던 일행 앞으로 정글을 연상케하는 나무더미가 막아선다. 하필이면 옛길을 따라 나무를 베어놓은 것인데 실어내지 않아 길만 막고 있었다.

 

 

한아름씩 되는 나무기둥이 통채로 넘어져 있는 그 길을 피해가느라 좀체 속도가 나지 않자

일행은 김씨가 일러준대로 성마령을 향해 나침반을 고정시키고 곧장 오르기로 한다.

 

 

비탈을 거슬러 오른 지 50분. 땀으로 범벅이 된 일행들은 마침내 임도에 올라서자

그늘 밑으로 모두들 쓰러지듯 주저앉는다.

 

 

아무리 옛길이라지만 너무 심한거 아닙니까"라고 불평하는 일행에게

김부래 기자는 "그동안 다녀본 옛길 가운데서 이곳이 가장 오래된 길"이며 "이곳이야말로 진짜 옛길을 찾아가는 묘미가 느껴진다"며 오히려 예찬론을 펼친다.

 

 

임도를 이리저리 오가며 정찰한 끝에 마침내 이어지는 옛길을 찾아낸 일행은 기분좋게 성마령으로 오른다.

 

 

100미터 가량 임도와 나란히 가던 길은 서서히 임도와 멀어지더니 숲속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보물을 만난 듯 낙엽으로 덮여 움푹 패여 아름답기 그지없는 옛길이 나타났다.

 

 

성마령 가는 길이 지금도 이렇게 넓고 좋으니 옛날에는 진짜 큰 길이었겠네요." 비로소 옜길다운 옜길을 만난 일행들은 그새 즐거운 마음이 되어 감탄사를 연발한다.

 

 

옛길은 폭이 6미터쯤 되었다고 문헌에 전하지만 지금은 낙엽 덮인 곳까지 합하면 3미터쯤 될까.

쓰러져 누운 나무들이 길을 막지만 이번에는 길을 좇아가기는 어렵지 않다.

길가에는 옛 집터의 흔적도 보인다.

 

 

드문드문 돌담이 쓰러진 돌무더기를 지나 물이 흐르지 않는 골짜기가 완만하게 이어진다.

성마령이 가까워진 듯 풀이 정갱이께 높이로 가득 덮인 곳에 이르니 마침내 주능선이다.

먼저 도착한 일행이 "저기에 돌탑이 있어요!"라며 외친다.

 

 

고개는 가슴께 높이의 돌탑과 함꼐 당나무가 지키고 있다.

돌탑 주변은 산딸기 넝쿨로 뒤덮여 있다. 빨갛게 익어 농염한 빛깔을 내는 딸기가 탑스럽지만

2시가 넘은 시각. 시장한 일행은 도시락부터 꺼내 먹는다.

 

 

고개에 봉수대가 있었다고 전하지만 지금은 찾아볼 길이 없다.

또 비석돌이 많아 비석을 만들어 달구지에 실어 평안리로 실어 날랐다 하는데

정선읍에 근무하는 나병기씨는 언젠가 직접 한번 비석의 흔적을 찾으러 답사를 할 예정이라 한다.

 

 

우마차도 다녔다는 골짜기 하산길은 가시 넝쿨이 가득해 발을 내딛기가 곤혹스럽다.

그런 골짜기를 얼마간 가니 점차 왼쪽의 지능선으로 옮겨가는 동안 다시 길 폭이 2미터 가량 됨직한 좋은 옛길이 다시 나온다. 가마도 오르내릴만큼 완만한 옛길로 30분을 내려가니 임도가 나온다.

 

 

 

 

임도에 주저앉아 얼음물을 들이키던 일행중 누군가가 "고개 마루에서는 원님마님도 내려서 걸었을까 아님 타고 넜었을까"란 수수꼐끼 같은 질문을 내놓는다. 아무래도 그건 평안리 촌로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삼막골로 내려가는 길은 시원하다.

 

 

 

길 흔적은 보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이 다니지 않아 발자국이 전혀 없다.

그래서 정말로 고개를 넘는 길손이 된 기분에 젖어 삼막골 농로에 도착했다.

 

 

살짝 가려 보이지 않는 성마령을 다시한번 쳐다보고 한치동으로 걸음을 옮겨놓는다.

백년 이상 나이 먹었음직한 큰 살구나무 아래 마을 사람들이 모여있다.

 

 

아낙들은 한창 나물을 다듬는 중이고,

한켠에선 남자들이 나무를 흔들어 떨어뜨린 살구를 주워모으로 있다.

노랗고 말랑말랑하게 익은 살구 하나를 주워먹어본다.

달고 신것이 과하지도 부족하지 않은 달짝지근한, 참 오랜만에 맛보는 살구다.

성마령 옛길이 꼭 이런 살구맛 같다. <글·이정숙 기자 사진·김부래 기자>

 

 

성마령(星摩嶺) 길은 큰성마령(약 960m)과 작은 성마령(약 860m)길이 있다. 이중 정선 군수가 부임하고 사람들이 주로 많이 넘어다니던 길은 큰성마령, 큰성마령은 정선읍 용탄리 행매동(원골)에서 미탄면 평안리 삼막골,한치동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주 길인 큰성마령을 그냥 성마령이라 불렀다. 한편, 작은 성마령은 큰성마령에서 주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949봉 전 안부로 추정된다.

 

 

성마령 옛길 답사구간은 약 9킬로미터. 2만5천분의 1지형도와 나침반을 휴대하고 고개가 있는 방향을 놓치지 않으면서 주의깊게 옛길을 밟아가면 산행에만 약 3시간. 그러나 길 찾는 시간, 휴식 시간을 감안해 5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또한 대중교통편을 이용할 경우 용탄3리 입구 마을 버스승차장에서 내려야 하므로 여기서 산행들머리인 김대옥씨 집까지 약 4.1킬로미터 가량 들어가는 시간도 고려해야 한다.

 

 

↑ 개념도
정선이 기점이다. 들머리 행매동까지는 정선시외버스터미널(033-563-1094)에서 가리왕산휴양림을 경유하는 회동행버스를 이용,용탄3리(용탄보건진료소 입구)의 버스승차장에서 내려 걸어들어간다. 터미널 출발시각은 06:20 07:20

 

 

09:10 11:10 13:30 16:20 18:00 20:00. 약30분 걸린다. 승용차는 가리왕산휴양림으로 가다가 벽탄교를 지나자마자 만나는 용탄3리 버스승차장 앞에서 좌회전해 작은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 약 4킬로미터 들어가면 행매동이 나온다. 날머리인 미탄면 평안리(한치동)까지는 평창시외버스터미널(033-332-2407)에서 평안리행 시내버스가 06:30 10:00 18:20 세 번 다닌다. 미탄버스정류장은(033-332-3723).

 

 



들머리 용탄리나 날머리 평안리에는 숙박시설이 없다. 정선쪽으로는 읍내나 용탄리에서 5분 거리인 가리왕산자연휴양림, 평창쪽으로는 미탄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정선 읍내에 정선장(033-563-0066). 동호호텔(562-9000). 용탄3리에서 5분 거리인 회동에 가리왕산자연휴양림(563-1566). 휴양림 입구에 회동마을쉼터(562-0035), 통나무가든민박(563-1898)등이 있다. 휴양림은 한 달전부터 예약이 가능하다.

 



5만분의 1 정선, 2만5천분의 1 용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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