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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리산 순환도보 4 본문

부엔 까미노

진주-지리산 순환도보 4

까미l노 2008. 6. 14. 00:54

 

의탄분교(폐교) 앞에서 의탄교를 건너면 그간 강으로 나뉘어 먼발치로만 보였던 지리산이 한결 가깝게 다가선다. 간혹 지리산둘레길 이정표를 놓치고 곧바로 직진해 아스팔트를 따라 벽송사까지 가는 이들이 있다. "이정표를 볼 수 없었다"는 게 그 이유. 길을 잃기로 작정한 날엔 눈앞의 이정표를 두고도 먼 길을 돌아가거나, 아예 길이 아닌 곳을 헤매며 고생할 때가 있다. 산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만약 도보여행 중 길을 잃었다면(딱히 물어볼 곳이 없으면) 가장 마지막에 본 이정표까지 되돌아가는 것이 제일 현명한 방법이다.

 

↑ 의중마을을 지나 세동마을로 가는 길. 1시간쯤 이어지는 숲길 간간이 엄천강이 내려다보인다. 머잖아 이곳에 지리산댐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반대와 찬성의 고달픈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등 뒤로 남겨둔 서암 가는 길

잠시 아스팔트를 따르는가 싶더니 오른쪽으로 좁은 계단이 이어진다. 금계에서 막 점심을 먹고 출발한 터라 짧은 오름길에도 헥헥, 숨이 차다. 이 나무계단을 올라서면 키가 꽤 큰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우러진 쉼터다. 뾰족한 솔잎과 날렵한 댓잎이 지리산의 하늘과 맞물려 사시사철 초록빛을 자아내는 곳. 벤치에 앉아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홀짝대며 잠시 숨을 고른다. 나뭇잎 사이로 의중마을의 낮은 지붕들이 보인다.

의중은 '의탄리의 가운데 마을'이라는 뜻으로 고려시대 지방특산물 탄(숯)을 중앙에 공납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행정구역 소(所)가 있던 마을이다. 의탄과 인근 군자리 일대에는 숯과 종이를 생산하던 지소와 탄소가 있었다. 15세기 후반 함양군수를 지낸 김종직이 "숯 굽는 골짜기에 연기가 난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지리산지 농업과 촌락 연구>를 쓴 정치영 박사는 그의 책에서 "실제 이 일대엔 종이의 원료인 닥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종이 생산에 필수조건인 깨끗하고 풍부한 수량이 있어 지소로는 최상의 입지조건"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참나무가 울창해 숯을 굽는 탄소로도 더할 나위 없는 자연조건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 조선시대에는 종이의 조달이 쉽지 않아 정부가 사찰에서 종이를 생산케 했고, 실제 1700년에는 종이 수요량의 절반을 사찰이 담당했다고 한다.

어쩌면 의탄리 역시 벽송사 등에 종이와 숯을 제공하기 위해 생긴 마을일지도 모르겠다. 마을 한쪽에는 닥나무 껍질을 벗기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지폈던 '삼굿터'가 있다. 1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삼굿터는 1990년대 중반까지도 그 맥을 이어왔던 곳이다. 고려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가야국 구형왕이 추성에 있을 때 이곳에서 참나무 숯을 구웠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3구간 종점인 금계마을을 뒤로 하고 의탄교를 건너면 본격적인 4구간이 시작된다.


서암을 거쳐 벽송사 가는 길을 버리고 좌회전해 마을을 벗어난다. 개통 초기엔 벽송사~송대마을로 이어지던 길이 주민들의 민원 등으로 폐쇄되는 바람에 2010년 봄, 의중과 용유담을 잇는 새로운 길을 열었는데, 근래엔 다시 의중마을 초입이 변경되었다. 모든 길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길들은 수시로 입구를 바꾸고, 출구를 바꾸며 오랜만에 찾아온 둘레꾼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도로 너머로 커다란 석불 조각 현장이 보인다. 얼핏 바위를 깨고 쪼아 '자연훼손'이란 오해를 받지만 석재를 캐내고 방치된 곳을 다듬는 것이라고 한다. 중국의 석공까지 동원됐다니 향후 멋진 예술작품을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엄천강을 옆에 두고 본격적인 숲길이 펼쳐진다. 오래도록 눈이 오지 않았는지 이파리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깡마른 숲속에 벌거벗은 나무들뿐이어서 마치 흑백사진 한 컷을 보는 듯하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을 때를 빼고는 딱히 소리도 없는 조용한 숲을 벗어나자 아스팔트가 깔린 용유교가 나온다.

만약 초창기 코스인 송대마을에서 내려왔다면 너른 바위 사이에 자리한 400년 된 소나무를 만날 수 있다. (사)숲길에서 '소나무쉼터'라 이름 붙인 이곳의 본래 이름은 '세진대.' 아주 예전 사찰 '마적사'를 오가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마음과 몸을 씻었다고 하여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세진대 옆에는 '장독바위'가 있는데 아픈 사람이 돌을 던져서 그 위에 얹으면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다. 세진대에 서면 법화산 자락과 저 멀리 넘어온 등구재(3구간), 옛 선인들이 천왕봉을 오를 때 마다 거쳤다던 용유담과 엄천강이 보인다.

 

↑ 의중마을의 깡마른 노거수 앞에 앉아 다리쉼 중인 취재진. 여름엔 무수한 잎으로 시원한 그늘이 되어준다.


강은 계속 흘러야 한다

지리산 북부권의 뱀사골, 백무동, 칠선계곡의 물이 합수돼 흐르는 용유담을 기점으로 상류를 임천, 하류를 엄천이라 부른다. 김일손은 1489년에 쓴 <속두류록>에서 "못은 남에서 북으로 깊이 패여 아득하고 바윗돌이 기이하여 인간세상에서 멀리 떠나 천리 길을 온 듯하였다"라고 용유담을 설명하고 있다. 1586년 양대박의 <두류산기행록>,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1643년 박장원의 <지리산기>,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 1790년 이동항의 <방장유록>에도 용유담의 기묘함과 아름다운 절경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용유담의 대표적 전설은 마적도사 이야기다. 옛날 옛적 용유담 인근에 마적사를 짓고 당나귀(또는 말)를 기르던 마적도사가 있었다. 마적도사는 사찰에 식량이나 부식물이 떨어지면 쪽지를 써서 당나귀 등에 달아주었고, 이를 본 상인들은 쪽지에 적힌 대로 생필품을 실어 보냈다. 볼 일을 끝낸 당나귀는 오도재를 넘어 용유담으로 돌아와 나귀바위에서 울었고, 그 울음소리를 들은 마적도사는 용 아홉 마리를 시켜 다리를 놓아 당나귀가 건너오게 하였다고.

하루는 당나귀를 장에 보내놓고 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용유담의 용들이 눈먼 용 한 마리만 제하고 서로 먼저 여의주를 얻어 등천하겠다고 얽히고설켜 싸운 모양이다. 무거운 짐을 이고 소리 내어 울부짖어도 소용이 없자 나귀는 그대로 지쳐 쓰러져 죽고 만다. 뒤늦게 전후 사정을 파악한 마적도사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장기판을 팽개쳤는데, 그 조각 한쪽이 지금도 마적사에 남아있고 다른 한 조각은 용유담 건너 나귀바위에 떨어졌단다. 또 아홉 마리 용 가운데 눈먼 용 한 마리만 남겨놓고 여덟 마리는 모두 쫓아버렸다는 이야기다.

용유담은 지난 2008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보전대상지 시민공모전 '꼭 지켜야 할 자연유산·문화유산 부문'에서 장려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용유담을 포함 전북 남원과 경남 함양군 경계지점에서부터 하류인 함양군 문정마을까지 길이 400m, 높이 103m 규모의 지리산댐이 건설될 예정이다. 관련 단체의 자료에 따르면 댐이 건설될 경우 천혜의 원시림인 칠선계곡 하부가 수몰되며 그에 따라 인근 지역 생태계가 교란된다. 엄천강에는 멸종위기종인 수달과 얼룩새코미꾸리 등이 살고 있다. 용유담은 반달가슴곰의 생태이동통로여서 댐 건설과 함께 이동통로가 단절되어 반달곰 서식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하여 2012년 6월 문화재청에 용유담 명승지 지정을 신청했지만 현재 보류된 상태다.

 

↑ 운서마을과 동강마을을 잇는 구시락재에서 구간 종점인 동강마을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얼마전 제주올레길 전구간 개통과 더불어 전국 곳곳에 산재한 도보여행길을 진단한 뉴스 보도가 있었는데, 그때 문제 사례로 등장한 곳이 이곳 용유담에서 세동마을을 지나 운서마을 직전까지 이어진 4km 남짓의 아스팔트 도로였다. 곧게 뻗은 아스팔트이니 오르는 수고는 없지만 이 길은 여름에도 겨울에도 걷는 이들에겐 곤욕이다. 그 때문인지 최근에 아스팔트 초입에 '전설탐방로'가 새롭게 길을 열었다. 앞서 말한 마적도사 이야기를 소개한 이 길은 엄천강 가까이 연결돼 세동마을 직전에서 다시 아스팔트로 연결된다.

황금을 버린 형제, 이억년과 조년의 이야기

2007년 전국 최우수 산촌생태마을로 선정된 세동마을(www.songjunri.com)은 한때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닥종이 생산지였다. 주변 산으로 닥나무가 지천이어서, 닥나무를 삶고 벗겨 다시 껍질을 긁어 말리고, 재물에 삶아 두들겨 닥풀을 넣어 발로 종이를 뜨는 작업이 연중 끊이질 않았다. 또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이 마을의 모든 집들은 제1구간 주천~운봉의 회덕마을처럼 억새를 띠로 이어 얹은 샛집이었다.

왼쪽 강변으로 와룡대와 유적비가 보인다. 크고 평평한 바위틈에 반송이 있고, 끊어진 옛 다리가 있어 여행 중에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고종 광무 10년(1906) 무산 강신영(1840~?)이 와룡대라고 이름 짓고 친구 일곱 명과 해마다 계모임을 가진 곳이다. 원래 이 일대는 일두 정여창(1450~1504)과 김일손이 지리산을 유람하며 '살만한 곳(可居)'이라 하여 가거동으로 불렸다. 와룡대는 또 어린시절을 엄천강변에서 보낸 이들에게는 신나는 소풍 장소였다.

 

↑ 너른 아스팔트를 버리고 운서마을로 향하는 길


강 건너 문정마을 위쪽 오른편에 황금을 강에 던져 버린 일화로 유명한 이억년과 조년 형제 중 형 억년의 묘소가 있다. 이조년은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로 시작하는 시조 '다정가'를 쓴 고려시대의 문신. 이들 형제 중 맏형 백년은 나중에 동생 억년과 함께 지리산 함양 근처로 낙향해 여생을 보낸다. 그로 인해 백년의 이름을 딴 백연마을이 생겼는데 바로 세동마을 맞은편, 엄천강 너머이다.

억년과 조년의 '투금탄' 이야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금덩이를 주워 나눠가진 형제가 나룻배를 탔는데 갑자기 아우가 그 비싼 금덩이를 한강에 던져 버리더란다. 깜짝 놀라 "무슨 짓이냐?" 묻는 형에게 "제가 어찌 황금 귀한 줄을 모르겠습니까. 평소에 두터웠던 우리 우애가 아닙니까? 그런데 황금을 주운 뒤에 '만약 형이 없었다면 나 혼자서 금덩이 두 개를 다 가질 수 있었을 텐데…'하는 사악한 마음이 들어 강물에 버린 것입니다." 동생이 대답했고, 형 역시 "네 말이 옳다"며 자신이 가졌던 금덩이마저 물에 던져 버렸다는 것. 이들이 금덩이를 버린 곳은 머나먼 서울의 한강이지만 이들의 살과 뼈와 영혼에 안식을 준 곳은 결국 지리산이었다.

역시 엄천강 건너 한남마을에는 세종대왕의 열두째 왕자인 한남군이 귀양왔던 새우섬이 있다. 크지도 넓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지리산 북쪽을 흐르는 엄천강변에는 1천 년을 거스르는 역사의 흔적들이 즐비하다. 이것 역시 지리산둘레길의 힘이자 매력이다.

둘레길의 밤은 길고 아름답다

얼굴 위로 차가운 것이 떨어진다. 비다. 한겨울 지리산에서도 비를 맞은 적이 있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새벽에 빗방울이 되어 떨어진 적도 있었다. 여행 중에 비를 맞는 것도 흔한 일이지만, 그래도 어차피 내릴 것 눈이면 얼마나 좋아. 카메라를 오버재킷 안에 넣고 어두워진 구시락재를 올라서는데, 이번엔 다시 눈이다. 아직은 진눈깨비 같은 작은 결정체지만 눈이 내리고 있었다. 구시락재에 서면 함양군 휴천면 동호, 원기, 동강마을과 산청군 금서면 자혜마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 멀리 오른편에 산청군 왕산이, 가깝게는 꽃봉산(236m)이 보여야 한다. 하지만 산 아래까지 내려앉은 눈구름 때문에 보이는 것은 많지 않다.

 

↑ 눈 내린 다음날, 지리산둘레길 숙소의 아침 풍경


서글서글한 마을길을 내려오면 팽나무쉼터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김종직의 기행문에는 '화암'으로 기록된 곳으로 그 옛날 지리산 유람에 나섰던 선비들이 쉬었던 곳이고, 소를 먹이던 동네 조무래기들의 쉼터이며, 나무꾼이 지게를 내려놓고 늘어지게 한숨 잠을 자던 곳, 그리고 지금은 지리산둘레길을 걷는 도보여행객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나무다. 지리산둘레길은 팽나무쉼터를 직접 거치지 않고 곧바로 직진, 마을 입구에 닿으면서 끝이 난다.

그리고 후일담, 둘레길을 걷는 내내 흐린 날씨를 선보이더니 숙소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솜을 뿌리는 듯한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오려면 좀 더 일찍 오지, 흑백사진 같은 그날의 풍경이 내내 아쉬운 참이었다.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한 지리산갤러리 '길섶(010-5280-9584)'에는 그 밤 내내 눈이 내렸다. 그게 꼭 눈 때문이 아니라도 둘레길만 걷고 휭하니 돌아가는 그대, 지리산자락의 민박집, 뜨끈한 아랫목에 등을 깔고, 창문을 두들기는 칼바람 소리를 들으며 배낭에서 꺼낸 카메라의 사진을 한 장씩 넘기기도 하고, "여기는 눈 내리는 지리산" 지인들에게 문자를 날리기도 하며, 하루쯤 곤한 몸을 눕혀도 좋을 듯하다. 겨울엔 역시 눈이다.

 

월간 산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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